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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성지 황사영,최양업 신부님소개
    관리자  작성일 2012.04.04  조회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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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은 처삼촌 정약종이 들려준 천주학에 매료되어 1790년에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고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한 후 알렉시오(Alexius) 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한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최인길의 집에서 주 신부를 만나고부터는 벼슬길을 버리고 전교사업에 힘을 기울인다. 1798년 서울로 이주하여 살면서 신자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문으로 된 교회서적을 번역하는 등 활동적인 교회 지도자로 부상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피신하여 황심, 김한빈, 송재기로부터 박해의 진행사항을 들었고 교회의 재건방안을 생각하거나 글 쓰는 일로 소일한다.
그 해 8월 23일 황심으로부터 박해의 소식과 주문모 신부의 순교사실을 듣고는 박해의 경과와 교회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려고 백서를 쓰기 시작한다.

황심이 9월15일 체포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으며 백서는 압수된다. 황사영과 관련자들이 순교한 후 백서 사건은 종료되지만 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생겨난다. 하지만 한번 전파된 천주교 신앙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빠르고 더 넓게 온 나라 구석구석으로 전파되어 갔다.

                    
            
                                                                                                                                                                                                                                                                                                                                                       
                            

신유박해(辛酉迫害) 가 무엇인가요?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가톨릭교도 박해사건으로 순교자가 52명이었다.

1800년(정조 24년) 6월(음) 천주교에 대한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順祖)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고,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 김씨는 섭정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왕대비는 원래가 노론벽파(老論僻派)에 속해 있었으므로, 집권하게 되자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詩派)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상(國喪)으로 즉시 박해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국상이 끝난 지 얼마 안된 그해 12월 17일(음)에 중인(中人) 최필공(崔必恭)이 다시 구속되고 그의 사촌 동생인 필제(必梯)가 잡혔다.

이어 정초에는 배교자 김여삼(金汝三)의 밀고로 서울의 회장 최창현(崔昌顯)을 위시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잡혀 포청은 갇힌 사람들로 가득 찼었다. 이어 정월 10일(음)에는 공식 박해령을 내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을 빠짐없이 고발케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리었다.

엄명을 내린 지 9일 만인 10(음)일 명도회장(明道會長) 정약종(丁若鍾)의 책고리짝이 발각되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 박해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근(楊根)에서 박해를 피해 한양으로 이사왔던 정약종은 신변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 그리고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편지 등을 담은 책고리짝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 발각된 것이었다.

이예 천주교를 엄단하라는 상소문이 연달아 올라와, 마침내 2월 9일(음) 이가환(李家煥), 홍낙민(洪樂敏),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을 잡아다가 국문(鞫問)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권철신(權哲身), 정약종(丁若鏞)도 잡혀 의금부에 갇히었다.

남인의 중요한 지도자인 동시에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들인 이들의 국문은 2월 10일(음) 시작하여 26일(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그들 중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洪敎萬), 최필공, 이 승훈 등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박해는 지방으로 확대되어, 충청도 `내포(內浦)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이 2월 9일(음) 공주(公州)옥에 갇히었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2월 26일(음) 정약종 등과 함께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이틀뒤 공주로 다시 이송되어서 참수로 집행되었다. 여주(驪州)와 양근의 천주교인들은 전년도에 이미 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그들의 결안(結案)이 확정된 후 각기 본고향으로 보내 사형에 처하여 일반 대중을 경고케 하였다.

이리하여 3월 13일(음) 여주 성문밖에서 5명이 순교하였는데, 그들은 원경도(元景道), 임희영(李喜永), 최창주(崔昌周), 이중배(李中培), 정종호(鄭宗浩)등이다. 양근에서도 같은 무렵에 10여명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 난 순교자는 유한숙(愈汗淑)과 운유오(尹有五)였다.

4월 2일(음)에는 또다시 6명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약종의 아들 철상 (哲祥)과 최필공의 사촌인 필제(必悌)와 중인 정인혁(鄭仁赫), 그리고 여교우 윤운혜(尹雲惠), 정복혜(鄭福惠)와 이합규 등 이었다.

2월 말(음) 남인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참수 또는 옥사, 유배됨으로써 끝난 것으로 보였던 박해는 3월12일(음) 주문보 신부의 자수로 가열되었다.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이래, 주로 강완숙(姜完淑)의 집에 거처하면서 전교에 힘써왔는데, 포졸들이 그의 거처를 탐지하고 덮쳤으나, 미리 이를 알아차린 주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하여 체포를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도피로 집주인 강완숙 일가와 많은 교우들이 갑혀 들어가자, 주신부는 자기로 인하여 많은 교우들이 고통을 받게 됨을 알고 자수키로 결심하게 되었다. 주신부에 대한 국문으로 이희영(李喜英), 김이백(金履白), 김건순(金健淳), 강이천(姜彛天) 등 9명이 잡히였으며, 주신부를 한 때 궁안으로 피신시킨 사실과 세려를 받은 일이 드러나, 은언군(恩彦君) 이 인(李絪)의 처 송씨(宋氏)와 그의 자부(子婦) 신씨(申氏)에게는 사약(賜藥)이 내려졌고, 그 여파로 강화(江華)에 유배 중이던 은언군 자신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주신부는 4월 19일(음) 군문효수(軍門梟首)되고, 그 이튿날에는 김건순, 이희영 등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쳐형되었다. 주신부를 6년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도 2월 24일(음) 아들 홍필주(洪弼周)와 함께 잡혀, 궁녀 강경복(姜景福), 전 궁녀 문영인(文營仁), 최인철(崔仁喆), 김현우(金顯禹) 등 8명이 5월 24일(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함께 사형선도를 받은 고광성(高光晟), 이국승(李國昇), 윤 점혜(尹占惠), 정순매(鄭順每) 등 4명은 각기 고향으로 이송되어 처형당하였다.

7월에 들어서서는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와 김종교 (金宗敎)가 순교하였다. 전주(全州)에서는 3월(음) 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유항검(柳恒儉), 유관검(柳觀儉) 형제를 비롯하여 일가족이 많이 체포되었다. 유관검이 고문에 못 이겨 많은 교우들의 이름을 대니, 불과 몇 일만에 200여명이 옥에 갇히였는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이들에 대한 문초가 계속되는 동안, 소위`양박청래\'(洋舶請來) 계획이 탄로되어 이와 연관된 이우집(李宇集), 윤지헌(尹持憲), 황심(黃沁), 김유산(金有山) 등이 잡히게 되고, 이 연줄로 옥천희(玉千禧) 등이 잡히게 되었다. `양박청래\' 관련된 이들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곧 사형을 언도받아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9월 17일(음) 능지처참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신유박해는 황사영(黃嗣永)의 체포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고발로 이미 2월11일에 체포령이 내렸으나, 7개월이 넘도록 그의 행방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황사영이 북경 왕래자의 하나라는 유관검의 고발로 말미암아, 9월 25일에 잡히자, 황심의 자백으로 황사영도 9월 29일(음) 은신처인 충청도 제천(堤川) 배론에서 잡히게 되었다. 함께 피신 중이던 김한빈(金漢彬)도 같이 잡았다.

황사영은 2월 10일(음) 박해가 일어나자 이 곳으로 와 숨어살면서,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의 실정과 조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양박(洋舶)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帛書)를 작성한 곳도 이 곳에서였다. 황사영은 곧 한양으로 압송되어 황심, 김한빈, 그리고 곧 이어 잡혀 들어온 옥천희와 현계흠(玄啓欽) 등과 함께 문초를 받았다.

그 중 김한빈과 황심은 10월 24일(음) 판결을 받고, 그 이틀날 참수되었다. 황사영만은 <백서> 작업과정에서 정약용, 정약전 등과의 공모 여부 를 가리기 위해 정약용과 정약전 등이 다시 잡혀 왔으나, 황사영의 단독적인 것이라는 주장과 공모에 대한 증거가 없어, l1월 5일(음) 황사영에게 대역부도죄가 선고되어, 그날로 능지처참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옥천희와 현계흠도 함께 참수되었다.

황사영과 그와 관련된 자들을 신문하고 있는 동안 동지사(冬至使)가 출발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 박해에 저명인사들이 많이 관련되었을뿐만 아니라, 청국인 주문모를 처형한 사변을 변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므로 조정에서는 조윤대(曺允大)를 동지사 겸 진주사(陳奏使)로 임명 하는 동시에 가지고 갈<토사주문>(討邪奏文)의 내용과 진주방법 등을 구레체으로 검토하였다.

<토사주문>은 대제학(大提學) 이만수(李晩秀)가 작성하였고, 주문내용의 증명으로 <백서>의 사본도 갖고 가기로 하되, 그 중에서 불리한 내용은 이를 삭제하여, 그 내용을 대폭적으로 축소시킨 소위<가백서>(暇帛書)를 가지고 갔다.

이렇게 해서 황사영 사건이 일단락되자 조정에서는 박해의 전말과 옥사(獄事)를 변호하는 반교문(頒敎文)을 준비하면서, 아직도 처결되지 않은 사학죄인은 세 전(歲前)에 그 집행을 끝내도록 지시하였다.

드디어 12월 22일 토사교문(討邪敎文) 즉 <척사윤음>(斥邪倫音)이 반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신유박해는 끝나게 되었다. 즉 이미 내려진 사형선고는 이를 속히 집행할 것과, 미결 사학죄인에 대한 신문도 세전에 끝낼 것이고, 더 이상의 수사는 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한양에서는 이경도, 변득중, 권상문 등 15명이 12월 26일(음) 순교하였고, 전주에서는 유항검의 처 등 일가친척들이 12월 28일(음)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지막 공식적인 사형집행이었다.

이렇게 해서 가혹하고 잔인했던 신유박해는 끝났는데, 박해로 희생된 자들의 수는 처형된 자가 약 100명, 그리고 유배된 자가 약 400명으로 도합 500명 선에 달하였다. <토사교문>의 반포로 피비리내 나는 학살은 일단 멈추었으나, 천주교를 국가의 원수로 단정함으로써 앞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할 수 있는 법적근거를 마련한 셈이 되어, 천주교 전파에 커다란 장애물로 등장하였다.

어쨌든 신유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숨어 들어 가톨릭신앙의 전국적 확산을 촉진하였다. 이로써 종래의 지식인 중심의 조선가톨릭교회가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신해박해(辛亥迫害) 가 무엇인가요?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년(정조 15년)에 있었던 박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1791년 5월(음) 모친상(母親喪)을 당한 윤지충은 북경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의 제사금지령에 따라 이해 8월 그믐(음)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고 권상연도 윤지충을 따라 신주를 불태웠다.

그러나 윤지충의 친척과 이웃들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건이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되자 척사자(斥邪者) 홍낙안은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편지를 보내 피신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체포를 독촉하는 한편 좌상 채제공에게는 두 사람의 처형과 천주교 탄압을 요청하는 장서를 올렸고 이러한 홍낙안의 장서를 시작으로 천주교 배척의 상소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11월 28일(음11월 3일) 교주(敎主)로 고발된 권일신(權日身)과 서학서를 들여온 이승훈(李承薰)이 체포되고 이어 서울에서 최필공(崔必恭)을 비롯한 11명의 교우가, 충청도에서는 이존창(李存昌) 등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고 이와 함께 회유책으로 천주교서적을 없애고 자수한 천주교인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전국에 붙게 되었다.

그후 12월 8일(음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 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박해는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고 이미 들여온 홍문관(弘文館)의 서학서도 불태워지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황사영1775년 당시 유명했던 창원 황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덕소(德紹)다. 어려서부터 총명과 재덕이 남달리 뛰어나서 이미 16세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다. 정조대왕이 그를 불러 치하한 후 그의 손목을 붙잡고 '네가 20세가 되거든 내게로 오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고 하셨다 한다. 그때부터 황사영은 임금님이 만지신 손목을 붉은 비단으로 감고 다녔다 한다.

            

당시는 정조 치하로서 탕평의 정책 아래 남인들의 정계 진출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고 정조의 주목을 받은 그는 출세가 보장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후 황사영은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을 한다. 황사영은 결혼한 해에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세례명은 알렉시오이다.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혼인을 통한 처가 쪽의 영향일 것이며, 장인 정약현의 첫 부인은 이벽(세례자 요한)의 누이였고, 셋째 동서는 후에 순교한 홍재영(프로타시오)이며,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한 이는 이승훈(베드로)이다.
황사영은 영세를 하고난 후부터 세속의 공명과 영화를 뜬 구름으로 여기고 교리 연구에만 열중하며 교회 안에서도 회장직을 맡아 성실하게 이행한다. 후에 정조대왕은 황사영이 과거시험에서 백지를 내는 것을 아시고 대신들을 통해 충분히 공부하여 응시하도록 권유하였으며 또한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듣고서는 몹시 슬퍼하며 연민의 정을 나타내셨다고 한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녔는데 10일 이내로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망명의 길을 떠난다. 수염을 자르고 상복을 입고 2월 15일 서울을 빠져나와 김한빈의 안내로 여주, 원주를 거쳐 제천 배론 교우촌으로 숨어든다. 이웃사람에게는 서울 사는 이씨이고 상을 당한 이(喪人) 라고 하였으며 옹기점 옆에 토굴을 파고, 그 속에서 8개월간을 은거하며 살아간다.

김한빈(베드로)과 황심(토마스)을 외부 연락원으로 교회 소식을 듣곤 하였는데 8월 23일 황심으로부터 주문모 신부가 자수한 후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심을 한 황사영은 북경주교에게 박해의 소식을 알리고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백서(帛書)를 쓰기 시작한다.
9월 15일 황심이 먼저 잡히고 9월 29일 황사영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다. 그 해 11월 5일 황사영은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한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소재하고 있다.

            

▶ 최양업 신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년) 신부는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세례명은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하였다.             


            

1. 생애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 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뜸이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다. 최양업은 16살이 되는 해에 이 곳 수리산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등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방 신부는 그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제 1회 조선 신학생의 선서문

                        

1836년 12월 2일

                        

                        

조선 신학생이 수업할 신학교 교장 ○○○ 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노라.

                        

나에게와 또한 나의 뒤를 이어 조선교회를 다스릴 목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맹세하느냐?

                        

- 맹세합니다.

                        

나에게와 또한 나의 뒤를 이어 조선교회를 다스릴 수석성직자들에게 장상의 허가 없이는 그들이 지정하지 아니한 다른 지방이나 다른 회로 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느냐?

                        

- 맹세합니다.

                        

외방전교회 신부 조선선교사, 조선교회의 수석으로 있는(이 아래에 있는 서명한) 나는 이 소년들 - 즉 최 프란치스코(최 야고보와 황 안나의 아들, 태생지 : 경기도 남인), 최 토마스(태생지 : 충청도 홍주 다래골), 김 안드레아(태생지 : 충청도 밋내 놀매) - 이들이 오주(吾主) 예수 고상 앞에서 복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1836년 12월 2일 서약하였음을 받았음.

                        

                        

베드로, 필립벨도, 모방, 조선 선교사

                    
            

            

세 소년은 마침내 그해 12월 3일 마카오로 가기 위해 의주(義州)를 향해 서울을 떠났다. 이들은 출발에 앞서 그 전날 모방 신부 앞에서 소명(召命)에 충실하고 장상들에게 순종할 것을 선서하였다.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유지 교우들이 그들을 동행했는데 이들은 세 소년을 변문(邊門)까지 인도하고 거기서 새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일행이 12월 28일 변문에 도착한 후, 세 소년은 중국인 안내원을 따라 중국 대륙을 횡단, 이듬해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경리부 책임자 르그레주아(Legregeois) 신부는 경리부 안에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신학생 3명을 교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르그레주아 신부 책임 하에 경리부 차장 리부아(Libois) 신부가 주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후에 조선 선교사로 부임한 데플레슈,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 등 선교사들이 마카오에 체류하는 기회에 그들의 교육을 돕기도 하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전후해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마닐라로 피난해야 했고, 또 최방제와 1년여 만에 사별(死別)하는 등 그들의 유학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래도 1842년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1842년 그들은 아직 수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실(Cecille) 함장이 마카오의 경리부를 찾아와 조선원정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1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경리부장 리부아 신부는(그간 르그레주아 신부는 파리본부로 전임되었다) 벌써 몇 년째 조선교회와 소식이 끊겨져 있었으므로 세실의 요청을 하느님의 섭리처럼 생각하고 쾌락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어떤 이득을 얻어 보려는 심산에서 군함 2척, 즉 에리곤호와 파브리트호를 파견했었는데 세실은 에리곤호의 함장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건강이 약한 김대건을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먼저 에리곤호에 태워 보냈다(2월 15일). 한편 최양업은 파브리트호로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입항(入港)이 늦어져 7월 17일에야 요동(遼東)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와 같이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8월 23일 오송(吳淞)에 이르러 최양업은 먼저 떠난 김대건과 만났다. 그런데 세실은 남경조약이 체결되자(8월 29일) 더 이상 북상(北上)하기를 포기했으므로 두 신학생은 프랑스 군함에서 하선하고 다른 방법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히 강남(江南)교구장의 주선으로 중국배 한 척을 얻어 우선 요동을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배로 10월 2일 상해(上海)를 떠나 10월 23일 요동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그 곳에 남아 입국을 시도하였고, 최양업은 몽고땅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신부와 합류하였다

            

최양업은 소팔자가(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한편 김대건은 입국에 실패했으나 그간의 조선교회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39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를 위시하여 그의 부친 최양업의 부모 등이 순교한 소식에 접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양업은 오히려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피로 물든 조국땅을 오히려 희망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 신부가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43년 12월 31일 개주(蓋州)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성성식에 참석한 후 최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소팔가자로 돌아왔고, 얼마 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도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간 김대건은 다시 한 번 훈춘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었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늦어도 12월 15일 이전)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계속 소팔가자에 남아 있었다. 한편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와 같이 입국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지만 주교를 대동하지는 못하였다.

            

최양업은 1845년 한 해를 기다림 가운데 허송한 뒤 1846년 초에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두만강 쪽을 통해 처음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최양업은 요동교구의 베르뇌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우며 1846년을 보냈다. 1846년 말 변문을 통해 두 번째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 때 그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들었다. 이제 최양업은 육로(陸路)로의 입국을 단념하고 해로(海路)로의 입국을 시도하고자 홍콩의 경리부로 갔다(그간 경리부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1847년 초에 홍콩에 도착한 최양업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한국순교자전기를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드디어 입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조선정부로부터 회답을 받기 위해 조선해안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1년 전 세실은 조선 서해안에 나타나 1839년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정부에 보내면서 1년 후 그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었다.

            

라피에르 함장은 메스트르 신부, 최양업 등과 같이 군함 2척을 이끌고 1847년 7월 28일 마카오를 떠났다. 그러나 두 군함은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완전히 난파하였다. 상해로부터 구조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양업은 육지로 잠입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부득이 구조선을 타고 상해로 돌아와야 하였다. 난파된 군함의 잔해(殘骸)를 거두러 갈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기다렸으나 그것도 프랑스의 국내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1848년도 지나가 버렸다.

            

1849년 최양업은 백령도를 통해 입국을 네 번째로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다. 최 신부는 다시 육로 입국을 시도하고자 5월 요동으로 떠났다. 연말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를 도우며 사목경험을 쌓았다. 12월 변문으로 떠났고, 이번에는 입국에 성공했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입국하지는 못했다. 실로 입국 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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