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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전래 이후의 박해와 103위 순교성인 - 1
    박경민  작성일 2013.09.14  조회 113     

103위 순교성인을 낳게 한 박해시대 상황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103위 한국 성인들은 모두 박해로 치명(죽음에 이름)한 순교자들입니다.


1784년 조선에 첫 가톨릭 신앙공동체가 탄생한 이후 약 100년 가까운 박해로 1만명 이상이 순교했고, 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골과 외딴 오지에서 신앙의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박해가 혹독할수록 대지를 적신 순교자들의 보혈은 더 많은 신앙의 싹을 꽃피었습니다. 순교자들의 거룩한 죽음 위에 뿌리내린 한국 천주교회는 이제는 세계교회가 주목할 만큼 성장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며 103위 순교 성인을 낳게 한 박해시대의 상황을 살펴 봅니다.


 


<자료 : 한국교회사연구소>


 


 


우리나라 최초의 박해는 1785년 을사년에 추조 곧 형조의 관리들이 명례방(지금의 명동)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신자들을 체포, 김범우를 단양(or 밀양 단장)으로 유배시킨 을사추조적발사건입니다.


 그러나 조정의 지시에 의한 최초의 박해는 이른바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1791년신해박해입니다. 진산 땅의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파묻은 것이 드러나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이후 1879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드케트 신부가 중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약 100년간 크고 작은 박해가 이 땅을 순교자의 피로 물들였습니다. 이중 1801년의 신유박해와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4대 박해라고 부르며, 이 4대 박해로 순교한 분들 가운데서 103위 성인이 탄생한 것입니다.


   


▲박해의 배경


 당시 조선은 유교를 문화적 지주로 삼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정학(正學)인 유학에 배치되는 서학(천주교 교리)은 사학(邪學)으로 배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조상제사를 금하고 만인 평등을 내세우는 천주교는 당시의 사회 윤리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악한 집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정치적 배경인 당파싸움도 박해의 주요한 원인이 됐습니다. 초창기에 천주교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남인계열의 소장학자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남인 사이에서도 천주교에 우호적인 친서계와 비판적인 공서계로 나뉘어졌습니다. 공서계 인물들은 노론 벽파와 함께 친서계 인물들이나 이에 동조하는 노론 시파 세력들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이밖에 외국 선교사 영입을 위한 신자들의 활동이 서양 오랑캐의 앞잡이 역할을 한 반역행위로 인식된 것이나 또는 밀고자나 배교자들의 고발도 박해의 한 원인으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작용해 박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신유박해 (1801년)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첨정을 시작하면서 노론 벽파의 주도로 이루어진 박해. 대왕대비는 신유년인 1801년 1월10일(양력 2월22일) 박해령을 내리면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기호 남인의 거두인 권철신(암브로시오)을 비롯해 이가환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 등 지도층 신자들이 체포돼 참수 또는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또 충청도에서는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이 붙잡혀 참수됐습니다.


 


박해는 3월12일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 자수하면서 더욱 가열됐으며 그 해 9월에는 이미 체포령이 내려졌던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그가 지니고 있던 \'백서\'가 발각됨으로써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신유박해는 12월2일 이미 내린 사형선고는 속히 집행하고 판결을 내리지 않은 죄인들에 대한 신문도 속히 끝내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말라는 \'토사교문\'이 반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신유박해로 인해 약 100명이 순교했고 400명 정도가 유배되었으나, 이들 순교자들은 아무도 시성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할 때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부터 그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시복 시성 과제입니다)


 


   


▲기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는 1839년(헌종 5년) 3월에서 10월까지 약 8개월여간 전국을 휩쓴 박해로 103위 한국 천주교 순교성인 중 70명이 이때 순교했습니다.


 


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노론 시파와 벽파 간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노론 벽파가 당시 권세를 잡고 있으면서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타파하고 권력을 재창출하기 위해 박해를 일으킨 것이지요.


 


박해는 1839년 4월18일(음3월5일) 순원왕후가 내린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으로 공식화 됐고, 배교자 김순성(일명 김여상)이 등장하면서 더욱 확산됐습니다. 김순성의 밀고로 조신철(가롤로),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과 최양업 신부님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등이 체포돼 순교했습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는 김순성이 갖은 악랄한 수단을 동원해 신자들을 현혹시켜 자신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우들의 재난을 그치게 하기 위해 자수해 순교했습니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 체포된 신자 수는 적으나 그 지역이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됐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직자들을 모두 잃어 침체기로 다시 빠지게 됐고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 구성원의 주류가 됐습니다. 또 조정에서 국경 감시를 강화했고,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우리 언양지역처럼 깊은 산중으로 피신해 교우촌을 이루거나 신분을 속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기해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많은 순교 성인을 탄생시켜 103위 한국 천주교 순교성인 중 주교와 신부 3명, 남자 24명, 여자 43명 등 총 70명에 이릅니다.


 


   


▲병오박해 (1846년)


 


\'병오박해\'는 병오년인 1846년 6월5일(음5월12일) 김대건(안드레아)신부님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돼 9월20일 종결됐습니다. 병오박해 순교자는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 현석문, 이간난, 김임이, 정철염, 우술임, 임치백, 남경문, 한이영 등 병오박해 순교자들은 모두 김대건 신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박해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기해박해를 경험했던 신자들은 박해 소문을 듣자 대부분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잠시 몸을 숨겼다가 몇 달 후 다시 교우촌 순방을 시작했을 정도였습니다.


 


병오박해가 이전 박해와 다른 점은 \'프랑스 함대\'의 출현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신자들이 옥에 갇혀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함장이 이끄는 군함 3척이 충청도 외연도에 1846년 8월9일 나타나 조정에 기해박해 때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데 대한 항의 서신을 전했습니다.


 


헌종은 김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을 서양 군대를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해 효수 판결을 내림으로서 결국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은 김대건 신부님과 신자들의 처형만 앞당기는 결과만 낳았습니다.


 


   


▲병인박해 (1866년~)


 


1866년(고종3년)초에 시작하여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8년간 지속된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됐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대 박해였습니다. 박해는 10여 년 간 지속됐습니다.


 


병인박해의 직접 원인은 위정자들의 \'외세를 배척하는 사상\' 때문으로, 1860년 10월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자 조선 위정자들은 프랑스 함대를 비롯한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게 됩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자 대원군은 남종삼(요한·성인)의 제안으로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견제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내세워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가 러시아의 남아를 막아준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하지만 대원군은 러시아의 월경행위가 잠잠해지고, 반대파들의 정치적 공세가 강화되며, 서양인들이 중국인을 살육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마음을 바꿔 \'박해령\'을 내립니다. 박해가 시작되자 전국 각처 교우촌은 유린됐고 선교사와 신자들이 체포돼 순교했습니다.


 


그 와중에 1866년 9월 제너널 셔먼호 사건과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발생했습니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절두산)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토가 서양 오랑캐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며 박해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노로 매도해 처형함으로써 집권의 한 방편을 이용했고, 정당성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박해가 누그러질 줄 모르는 상황에서 1868년 5월 독일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묘를 도굴한 \'덕산 굴총 사건\'이 터지자 박해는 불더미에 기름을 붇듯 번져갔습니다. 오페르트 굴총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감정이 악화돼 조정에서는 \'참수형\'을 명했으나 지방에서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는데 있어 교수형, 장살, 생매장, 백지사형 등 극형들이 남발되기도 합니다.


   


조선 천주교회는 병인박해로 인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이후 세번째 침체기를 겪었습니다. 전국의 교우촌은 철저히 유린됐고,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함으로써 교회를 이끌어갈 사람이 없게 됐습니다. 조선 천주교회는 그 후 병인박해 이전의 2만여명에 달하던 교세를 회복하는데 20여년이 걸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순교한 신자들은 대략 8000명에서 1만명.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들입니다. 이들 중 이름을 알 수 있는 24명만이 성인품에 올라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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