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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형
2. 역사
3. 사상,종교적 배경
4. 문화적 배경
5.맺음말 |
@언양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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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형
1) 위치
울산시를 중심으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하여 가고 있는 울산군은 경상남도 동쪽 끝에 위치하여 北은 경북 월성군, 西는 경북 청도군과 경남 밀양군, 양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南은 양산군에 인접해 있으며, 東은 끝없이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 일본을 마주보고 있다. 이 지역은 경상남도 북동부 동해안에 위치하는 군으로, 경.위도상으로 보면 북위 35도 19분 - 35도 43분, 동경 128도 58분-129도 27분간에 위치하며,동서의 길이는 43.25Km이고 남북의 길이는 39.40Km이다.
이 지역은 대내적으로는 2대 영남권(부산, 대구)의 가운데에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동남부와 일본 열도, 태평양, 동남아에 이르는 항로의 요충에 자리잡고 있고 위도상으로 국내의 창녕, 함안 등지와 국외로는 일본의 요코하마,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이란의 테헤란,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지브로울트 해협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한편 군사및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지역은 태백산맥 남단의 고산준령과 낙동강 하류의 지형적 장벽으로 인하여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전쟁에서 대륙침략의 발판지로 이용되었고 여러 내전 또는 대륙국으로부터의 침략이 발발할 경우 가장 안전한 요충지대였다. 특히 6.25 사변시 낙동강을 경계로 남침을 막은 최후의 요새였던 바는 특기할 일이다.
이러한 언양지역의 교통을 보면 경부고속도로(언양에서 서울간 387.5km, 언양에서 부산간 40.5km)가 언양시가의 남북으로 지나며 언양인터체인지로 부터 이어지는 언양, 울산간의 고속도로(14.3km)의 분기점이며 가지산터널로 유명한 울산, 밀양간의 24번 국도(언양에서 밀양간 55km)와 경주와 부산간을 잇는 35번 국도(언양에서 경주간 32km, 언양에서 부산간 64km)가 교차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및 관광지 그리고 성지로서 많은 이들이 이곳을찾고 있다.
2) 산과 강
울산군의 중앙부에는 울산만이 있고 해안선의 굴곡이 풍부하며 동으로 길게 뻗은 무룡산맥과 신흥령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와 동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또 문수산(600m)과 남암산맥이 남쪽의 불광산, 대운산(742m)과 서로 이어져 동남방으로 뻗어나 있으며 서북방에는 태백산맥의 최남단을 마무리하는 고헌산(1033m), 가지산(1240m), 영취산(1059m 대석산, 취서산, 취루산이라고도 함) , 신불산(1209m), 재약산(1108m) 등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산들이 병풍처럼 솟아 울성, 청도, 밀양, 양산군과 자연경계를 이루고있다.
이곳을 지나는 여러 강과 하천을 보면 먼저 울산시.군의 젖줄이요, 이 고장의 상징인 태화강이 가지산에서 출발하여 동으로 흘러 상북, 삼남, 언양, 범서면 등 군의 중심부를 지나 울산항으로 연결되어 있다. 또 동천강은 경북 월성군 외동면(옛 울주군 소속)에서 발원하여 농소면을 거쳐 태화강과 만나고, 회야강은 양산군 원적산에서 시작되어 웅촌, 청량, 온산, 온양면을 지나 서생, 진하에 이르러서는 바다로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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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 개관
울산시.군은 삼한시대부터 부족국가인 염변국(염포), 우시산국(검단리), 기저국(언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굴화리, 지화리, 구량리, 남창리, 검단리 등 5-6개 현으로 분할 통치되어 왔다. 고려시대 때 이 지역은 크게 두 지역(울산과 언양)으로 통합 되었는데 하나는 학성(울산)을 중심으로, 또 다른 하나는 언양을 중심으로 행정업무의 관할이 수렴되었다. 그후 900여년간 이 지역은 울산과 언양현의 두지역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1914년일제에 의해 울산군으로 개편됨으로써 처음으로 태화강 수계지역의 주민이 같은 생활권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1962년에 울산시와 울주군의 분리로 외적으로는 이 지역의 중심지와 주변지역이라는 현실관계가 이원화 되었지만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내적인 관계는 언양과 울산을 중심으로 울산지역이라는 통합된 지역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1990년 7월 1일을 기하여 울주군은 옛이름 '울산군'으로 개칭되었고, 98년 부터는 다시정식으로 '울주군'으로 사용되고 있다.
2) 시대별 역사
언양은 옛 언양현 지역이었던 삼남면, 삼동면, 상북면, 두동면, 두서면과 더불어 그 중심지역으로서 오늘날에도 울산군 서부 6개면의 중심지로 되어 있으며 이러한 중요성은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1) 삼한 - 통일신라시대이 시대의 언양은 현재의 상북면 길천리 지화마을에 치소(治所)를 두었던 삼한시대 변진(弁辰) 24국 중의 하나인 기저국(己抵國)의 중심부로서 신라 때에는 거지화현(居知火縣)이었다. 그후 통일신라시대 제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거지화현을 헌산(獻山)의 남쪽으로 현치(縣治)를 옮겨 헌양현(獻陽縣)이라 개칭하고 지금의 양산인 양주(良州:옛 삽량주)의 직할 속현으로 두었다.
(2) 고려시대
고려초기 제 6대 성종 14년(995년)에 헌양(언양)은 울산, 양산, 기장, 동래와 함께 영동도(嶺東道)에 속하였으며 제 8대 현종 때 헌양현은 동래와 함께 동경(東京 = 지금의 경주)의 영군(嶺郡), 울주(蔚州)의 속현으로 되어 있었다. 현종 13년(1022년)에 기장현, 동래현과 함께 울주에 병합되었으며 지금의 언양, 상북, 삼남면 외에 옛 신라의 구량화촌(九良火村)과 마등조(麻等鳥)이었던 지금의 두동, 두서지방이 헌양에 이속되었다. 제 17대인종 21년(1143년)에 헌양현을 울주에서분립시켜 감무*)를 두었으며 후에 언양(彦陽)이라 고쳤다.
(3) 조선시대
조선 제 3대 태종 때(1401-1418년) 두동, 두서지방을 경주의 남면으로 개편하였으며 동 13년(1413년) 10월에 전국을 각 도(道), 군(郡), 현(縣)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어 처음으로 8도제를 실시하여 경상도라는 명칭이 생겼을 때 언양현은 경상도에 속하였고 처음으로 현감(縣監,종6품)을 두었다.
제 11대 중종 14년(1519년)에 언양은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경상도의 동쪽인 경상좌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후 임진왜란후 전란의 극심한 피해로 현으로 자립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선조 32년(1599년) 5월 15일에 울산도호부에 합속시켰다가 13년이 지난 후인 광해군 4년(1612년)에 다시 현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조선개국 504년인 고종 32년(1895년) 5월 26일에 칙령 제 98호로써 지방제도가 공포되어 태종 13년(1413년) 10월부터 약 500년 간 존속되어온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府 331郡으로 나누어 관찰사가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때 언양은 언양군으로 동래부에 속하게 되었으며 울산도호부도 군으로 되어 군수를 두었다.
(4) 일제시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 손아귀에 들어간 조선은 1910년을 끝으로 한일합방이 되었다. 그후 1914년에는 울주군과 언양군은 합쳐서 울산군으로 병합,개칭되었는데 이는 900여년간 분리되어 있던 두 군의 합속이었다.
(5) 대한민국시대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우리나라는 남북이 분단되고 1950년에는 동족상잔의 6.25사변을 겪었다. 1962년 1월 27일 울산은 특정공업지구로 건설하기 위해 각령 제 403호로 공업도시 건설지역으로 공포되었으며 동년 2월 23일에 당시 울산군 대현면 납도(지금의 동양나일론 동편)에서 역사적인 울산공업센터 종합기공식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 의해 거행하여 울산은 공업도시로서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1962년 6월1일자로 울산읍이 시(市)로 승격됨과동시에 울산군은 없어지고 울산시와 울주군이 분립되었다. 특기할 것은 동년 11월에 남쪽의 서생면은 울주군에서 당시의 동래군으로 이속되었다가 행정 개편으로 양산군으로 이속되었으나, 1983년 2월 15일에 다시 처음과 같이 울주군으로 귀속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후 1991년 1월 1일에 울산군으로 또 개칭되었다가 1999년 현재에는 울산광역시 안의 울주군으로 다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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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상.종교적 배경
1) 개 관
경상도 지방은 신라 천년의 불교문화와 조선왕조의 유교문화가 성행하였던 곳이다. 그리하여 이들 종교는 경상도 지방의 사회.문화의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쳐왔다.
신라시대에 국교로 수용된 불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언양지방에서도 융성하게 발전하였으며 당시의 사찰중 언양의 석남사와 양산의 통도사는 지금도 지역주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억압정책이 추진되어 불교에 갖은 탄압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민간신앙으로서 계속하여 유지되어 왔다.
또한 조선왕조의 설립과 함께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들어선 유교는 다른 지방들보다 경상도 지방에서 더욱 번창하였다. 그래서 경상도 지방에서는 특히 뛰어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이들의 노력으로 곳곳에 사원이 설립되는 등 경상도 지방이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천주교의 수용과정에 있어서도 이러한 경상도 지방의 사상.종교적 배경 때문에 이 기존의 종교들과 많은 마찰과 대립이 있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천주교도 그 초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좀 더 쉽게 수용되고 용이하게 전파될 수 있었지만 경상도 지방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2) 불교
조선 초기에는 불교를 배척하는 논의,즉 척불론이 크게 일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 정부는 과감한 불교 탄압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탄압정책으로 사원의 토지와 노비가 몰수되어 사원의 경제력이 약화되었고, 도첩제의 실시로 승려의 수가 제한되었으며, 불교의 종파와 사원의 수도 정리되었다. 그 결과 불교는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기복신앙의 대상으로만 남아 왕실과 부녀자층에 유포되는 데 그치게 되었다.이렇게 신라 이래의 고찰들이 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던 정책과 수다한 병란 등으로 많이 없어졌으나 경상도 지방의 불교는 지속적으로 사회.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즉 조선 왕조의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상도지역은 신라 천년의 불교 문화로 인하여 다른 지역보다는 불교가 건재하였으며 많은 신도들이 여전히 기복을 위해 절을 찾는 등 민간 신앙으로서 존속하였던 것이다.
이는 이 지역이 불교를 국교로 한 신라의 수도인 경주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조 영조 때의 실학자요 지리학자인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의 '복거론산수'(卜居論山水)에서 "청도의 운문산과 울산의 원적산은 아울러 연해진 봉우리와 겹쳐진 뫼뿌리에 골이 깊숙하여 승가에서는 천명의 성인이 세상에 나올 곳"이라 하였고 또 "병란을 피할 수 있는 복지"라 하였다. 승가들에게는이러한 설이 작용하여 운문산에서원적산에 이르는 산곡에 크고 작은 절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언양의 석남사와 양산의 통도사는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석남사(石南寺)는 울산군 상북면 덕현리(德峴里)에 소재하고 있으며 사기(寺記)에는 신라불교의 5교 9산의 개종자(開宗者) 가운데 한 사람인 가지산(迦智山-長興) 보림사(寶林寺)의 개종자 도의(道義)가 헌덕왕 16년(824)에 창건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 절의 창건연대와 절을 세웠다는 도의국사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는데 도의가 주로 오대산(五臺山)의 석남원(石南院)에 있었기 때문에 이 절과 혼동하였다는 것이다. 그후 이 절은 임진왜란때 병화를 입어 파괴되었는데 현종15년(1674)에 탁령(卓靈), 선철(禪哲) 등의 선사가 중건하고 순조 3년(1803)에 다시 침허(枕虛), 수일(守一) 등의 선사가 중수하였다. 8.15 해방 후에는 불순분자들의 화를 입어 건물의 일부가 다시 파괴되었으나 주지 인홍(仁弘)이 중수하고 침계루(沈溪樓), 종각(鐘閣), 무진료(無盡寮) 등을 신축하였다. 석남사에는 보물 제 369호로 지정된 석조부도 1기와 지방 유형문화재 제 22호의 3층석탑이 있고 복원된 지 얼마되지 않았기에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한 신라말에 건조한 3층대탑이 있다.
3대본산(大本山)의 하나인 통도사(通度寺)는 양산군 하북면 영취산에 있으며, 선덕여왕 15년(646)에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가사(袈裟)와 사리(舍利)를 받아가지고 귀국하여 창건하였다. 자장은 이 절에서 금강계단을 쌓고 보름마다 불법을 설명하여 계율종(戒律宗)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그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6년(1603)에 송운(松雲)이 재건하고 인조 19년(1641) 우운(友雲)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특히 이 절에 보관된 은사입향로(銀絲入香爐)는고려시대의 우수한 예술작품이며 이 밖에 보물 제 74호의 국장생석표와 신라시대의 유품인 3층석탑, 사리탑, 석상, 석등 등은 진귀한 것이다. 통도사는 해인사(海印寺), 송광사(松廣寺)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3) 유교
이 지역의 유교 문화를 보면 고려 왕조 때부터 경상도에서 많은 유학가들이 배출된 것과 관계가 깊다. 당시의 경상도 출신의 유학가로는 신라 귀족의 자손으로 고려 건국 초기에 크게 활동한 최승로, 신라 왕손의 후예이며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중국에서 주자학을 배워와서 고려에 새로운 유학풍을 일으킨 안향,충선왕이 원나라에 세운 민권당에 출입하면서 중국의 유학자들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가진 이제현 등이 있다. 또한 여말의 충신이며성리학자인 야은 길재도경상도 출신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경상도는 특히 인재의 보고(寶庫)로 인식되었으며, 이 지역의 출신이 건국 초기부터 정계와 학계를 주도하면서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일찍이 경상도 감사를 역임한 하연은 [경상도 지리지](慶尙道 地理誌)의 서문에서 "경상도는 토질이 비옥함과 인물이 부서(富庶)함이 타도에 비해 월등히 우세하다. 이곳은 국가의 근본으로서 충신,효자,의부,절부가 배출되었는가 하면 풍류를 숭상하고 예악문물의 전통을 계승하였다"고찬양하였으며,또한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고려에서 조선 왕조까지 상하 수천년 동안 도내에서 장상,공경과 문장및 덕행이 있는 선비와 공을 세웠다든가 절의를 지킨 사람,선도(仙徒),불도 그리고 도교에 능통한 사람 등이 많이 나왔으므로 인재의 보고라 하였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선조 이전에는 국정을 주도하는 자가 모두 경상도 사람이며 문조에 배향된 4현(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도 또한 경상도 출신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14세기 말,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 시기에 있어서 이곳 경상도 출신의 정치가와 문인,학자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즉 이성계 편에 서서 새 왕조의 건국에 크게 공헌한 권근,권진,허조,정도전 등의 집권세력과 고려 편에 서서 끝까지 충절을 지킨 정몽주,이숭인,김진양,길재 등의 절의파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학문적으로 권학파이고,사상적으로는 숭유억불,대외정치는 배원친명(排遠親明)을 표방했으며, 사회,경제 정책은사전(私田) 개혁을 단행하였다.후자는 사학을 주도한 사림파로 발전해서 후에 영남학파를 형성시켰으며 성종대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계의 주도권을 잡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영남학파가 발전하였다. 즉 고려말, 조선 초에 살았던 야은 길재에서 비롯한 영남학파는 김종직,김광필을 거쳐 이언적으로 계승되고,드디어 퇴계 이황에 이르러 주리파라고도 불리우는 성리학의 큰 산맥을 이루었다. 그리고 퇴계 이황이 배출한 수많은 문하생들이 정계와 학계를 이끌어 나갔으며, 경상도를 조선의 '추로지향'(雛魯之鄕 ;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황보인,서거정을 비롯하여 성리학의 대가인 길재,김종직,김광필,김안국,이언적,이황,유성룡,김성일,정구,장현광,정세경,이현일 등의 훌륭한 유학자들이 경상도에서 출생하였다.16세기 후반 성리학에 있어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경상좌,우도를 대표하는 2대 산맥이었다. 이 두 학자는 처세술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으니 퇴계는 평생 학문에 침잠하면서도 정계에 나가 내외관직을 역임했으며, 경향각지를 왕래하여 그의 문하생이전국에서 모였다. 반면 남명 조식은시종 관계(官界)에 진출하지 않고 산림처사로 일생을 마쳤으며 그의 족적도 경남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선조 초의 중앙정계를 주도하던 인사들 가운데는 퇴계 문하를 출입한 자가 가장 많았고, 임진왜란 때 영남지방의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의병장 가운데는 남명 문하생이 많았다. 그리고 선조 8년 동서분당 때는 위의 두 문하생들이 동인편에 섰으나 동인이 다시 남(南),북(北) 당파로 갈릴 때, 퇴계 문인들은 남인,후자인 남명 문인 정인홍 등은 북인편에 서게 되어 서로 정치적인 견해를 달리했다. 16세기 후반 사림파가 중앙정계를 장악할때 퇴계학파는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다시피 했다. 또 퇴계는 기호(주기학파-서인), 영남 두 학파의 대립과 반목이 있을 때에도 두 학파와 두 지역 출신에 관계없이 조야의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주리설(主理說)을 추종하고 정치적으로는 남인이었던 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퇴계의 제자인 한강 정구의 학통을 잇는 학자들이었다. 즉 정시항과 이현일 및 서인인 송시열의 호적수로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을 들 수 있다. 이들의 학통은 성호 이익,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 등으로 이어져 실학사상을 부르짖는 근기학파(近畿學派)를 형성하였다.이 실학파 중에서 성호 이익의 제자인 이벽,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약용 형제와 권일신.철신 형제 등이 천주교를 믿어서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이다.
이처럼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으로부터 시작해서 고려시대에도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하고 조선시대에도 크게 유학이 성행했던 고장이 경상도였다. 특히 영남지방은 유학의 숭상으로 소수서원(백운동 서원)을 시초로 지방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세워진 뒤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당재의 기반이 된 서원이 많고 조선초기부터 유학이 발달한 선비들의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전통을 자랑하는 유학의 지방로서 어떤이질사상이나 이념을 수용하기를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지방색이 강한 곳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후기에 주자학에 사로잡힌 대부분의 조정의 신하들과 지방의 유학자들은 천주교가 충효사상에 반하고 군신의 도를 어지럽혀 사회의 윤리를 문란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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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화적 배경
1) 개관
아득한 오천년 전에 신석기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병영과 장현,신암의 바닷가에 많은 유적을 남긴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내륙으로 들어가 반구대의 암각화와 언양의 지석묘 등 한반도에서 보기 드문 문화유적을 남겼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수난의 역사를 지닌 울산시.군은 계변신과 처용의 고향이었다. 이렇게 쌀과 배로 이름난 산지이며 더불어 장생포의 고래잡이, 방어진의 오징어,장어잡이 등 어업 또한 성행하여1차산업의 고요만이 흐르던 조용한 농어촌이었던 이 지역이지금은 2, 3차산업의 공업지구로 기계소리 요란한 중화학공업 도시로 변모되어 문화적인 측면의 형성과 지원이 약화된 경향이 있다.
2) 지역민의 기질과 특성
이 지역의 지역민들의 기질과 특성은 전쟁을 비롯한 여러 역사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신라 이래로 많은 왜구들이 남쪽으로부터 자주 나타나 울산 해안으로 침투하여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였으며 이를 막기 위하여 이 지역에서는 많은 성들이 만들어졌다. 또 고려 때에는 이곳에 방어사를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병마절도사(병마절도사영, 좌도수군절도사영, 수군만호 등)를 두어 병영,개운포, 염포, 서생포에 두고강력하게 왜구에 대처하였으며 그 유적으로 병영성터가아직도 남아 있다. 이같은 왜구의 침범은 울산지역을 항상 불안케 하였으며,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요새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과는 이 지역의 인구 구조상에도 여성 인구의 우위지역으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또 조선 세종 때는 일본인과의 교역관계로 3포의 하나인 염포를 개항하여 일본인을 달래기도 하였으며, 3포를 개항(1606년)함에 따라 사실상 외래문화를 수용하게 되는 문호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일찍이 해양을 통해서 담배(1616-1622년에 전래)와 같은 작물이 전래되어 새로운 농가소득과 가내 수공업의 발달이 시작되었으며, 1930년 경부터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대현면과 삼남면, 온양면에 일본 배(梨)를 재배하기 시작한 이후 울산지방을 배의 명산지로 키우기도 하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은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1900년에 이곳의 [병영지]에 "진위군 제 3연대 제 3대대 병력 200여명이 끝까지 남아 1907년 8월17일 당시 이완용 내각의 군대 해산령에 불복하여 1907년 8월19일에 해산된 경주쪽과 함께 최후까지 투쟁하였다"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울산인의 성품과 풍속을 논하기를 "무예를 숭상하고 장사를 좋아하여 성품이 강하고굳세어 가히 문치를 일으켜쉽게 교화할 수 있다"고 평하고 있으며,이런 기질은 일제에 대한 3.1운동에도 크게 나타나 질기고 억센 저항운동을 전개하여 이 지역민의 기질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이러한 기질과 특성은 전설 속의 개운포와 처용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연결되었고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충성심과 망부석의 애틋한 전설 속에 살아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신불산에 축성하여 끝까지 항거하였던 선열들의 높은 기상으로 나타났다.
3) 토속신앙
이 지역민의 내적인 면에 영향을 끼쳐온 토속신앙을 보면 무엇보다도 이곳은 신들의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산악신을 중요시하였던 신라는 대, 중, 소사(小祀)를 구분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중사(中祀)와 소사(小祀)는 정복한 지역 본래의 산신이었다. 울산군 우불산에 있던 신(神)도 바로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신이었으며, 이러한 우시산 부족의 고유신앙이 신라의 정신문화로 편입되었다. 학성은 원래 신라의개지변이었던 곳으로 신라말에는계변성이라 하였으며 울산시의 수호신인 계변신이있었다. [동국여지승람] '울산 고적조'에 "고을 동쪽 5리에 있으며 김극기에 의하면 계변신이 학을 타고 신두산에 내렸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며 지금은 옛 터만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본군을 받들어 부르기를 본래 계변성이라 하였는데 신라말에 학이 와서 울었다는 옛 일로 말미암아 신학성(神鶴城)이라 고쳐 불렀다"고 적혀있다. 신학성은 오늘의 학성공원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이 이곳에 성을 쌓으면서 봉우리를 깎아내어 평평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성을 쌓은 뒤에는시루를 엎은 것 같다하여 시리성 또는 울산성이라고 하였다. 후에 학이 내렸다는 유적은 왜병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오늘에 와서는 울산시 중구 우정동 서낭당으로 옮겨져 아직도 울산의 수호신으로 남아있다.
또한 토속신앙과 연결시켜 보면 이 지역은 성씨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데 모두 29개의 성씨가 이 지역과 관련되어 있다. 신라 경순왕의 별자로 학성부원군으로 시봉된 김덕지를 중시조로 하는 울산 김씨와 신라 경명왕의 후손인 박윤웅이 중시조인 울산 박씨, 고려 고종 때 학성군으로 시봉된 이철이 중시조인 학성 이씨를 비롯하여 백씨, 임씨, 오씨, 문씨, 허씨, 음씨, 장씨, 최씨, 신씨, 윤씨, 조씨,정씨, 곽씨, 목씨 등19개 성씨가 울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으며, 신라 경순왕일곱째 아들로 언양군으로 시봉된 김선이 중시조인 언양 김씨와 장사랑 박유정의 후손인 언양 박씨를 비롯 장씨, 양씨, 최씨, 진씨, 전씨, 현씨, 조씨, 정씨 등 10개 성씨는 언양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이들의 후손 가운데 아직도 이 고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학성 이씨를 비롯 울산 박씨, 울산 김씨, 언양 김씨 뿐이라고 한다.
4) 유적과 문화재
울산군과 울산시의 문화재 중 지정된 문화재는 총 25점으로 국보 1기, 보물 5기, 사적 4개소, 천연기념물 3점, 중요민속자료 1점과 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 4점, 지방유형문화재 5기, 지방기념물 2기로 되어 있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국보
울산군 천전리 각석(川前里刻石)
(2)보물
① 울산군의 망해사지 석조부도(望海寺址石造浮屠)
② 울산군의 석남사부도(石南寺浮屠)
③ 울산군의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澗月寺址石造如來坐像)
④ 울산군의 청송사지 삼층석탑(靑松寺址三層石塔)
⑤ 울산시의 태화사지 12지상부도(太和寺址十二支像浮屠)
(3)사적
① 울산군의 청황산 요지군(天皇山窯址群)
② 울산군의 언양읍성(彦陽邑城)
③ 울산군의 관문성(關門城)
④ 울산시의 울산학성(蔚山鶴城)
(4)천연기념물
① 울산군 두서면의 은행나무
② 울산군 목도의 상록수림
③ 울산시의 울산극경회유해면(蔚山克鯨廻遊海面)
(5)중요민속자료
울산시의 이휴정소장복식(二休亭所藏服飾)
(6)지정문화재 외 문화재
① 울산군의 만년각(萬年閣)
② 삼남향교(三南鄕校)
③ 울산시의 이휴정(二休亭)
④ 울산향교
(7)지방유형문화재
① 상천리 국장생석표(象川里國長生石標)
② 청송사지 부도(靑松寺址浮屠)
③ 운흥사지 부도(雲興寺址浮屠)
④ 석남사 삼층석탑(石南寺三層石塔)
⑤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8)지방기념물
① 울산군의 언양 지석묘(彦陽支石墓)
② 울산시의 봉수대(烽燧臺)
이상 지정문화재 외에도 향토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주로 신라문화권에 속했던 이 지방 향토문화재는 가히 국보급에 해당되는 것도 있다. 유적 3개소, 고분유적 8개소, 불교유적 37점, 건축물 4점, 교육시설 2개소, 호국선열유적 11점, 관방시설 16개소, 동산문화재 8점, 요지 8기, 천연기념물 1점, 기념물 7개소, 명승지 11개소로 도합 116점에 달한다.
그외 최근에 발견된 울주군의 반구대 음각화는 미지정 상태에 있으나 그 유례가 드물기 때문에 국보급에 속하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덧붙여 1970년 12월에 발견되어 1973년 5월8일에 국보 제 147호로 지정된 '천전리 각석'은 암각화(岩刻化)로서 시베리아를 제외한 중국, 일본 등 극동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선사시대의 유적이다. 제1암각화는 가로 10m, 세로 3m의암면에상고시대에서 신라말기에 이르는기하학적 문양과 명문(銘文)을 새겼고, 고관이 행차하는장면과 기마인물상 등을 묘사하였다. 제 2 암각화는 북유럽이나 시베리아 신석기시대 미술에 직결되는 사냥예술로 사슴, 호랑이 등 많은 동물과 사냥을 하는 광경, 고래잡이의 모습 등 약 150여점이 새겨져 있는데 기법은 전면조(全面彫)와 선조(
線彫)로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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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음말
언양지역과 신앙 공동체의 발전을 살펴보기에 앞서 지형지세와 언양지방 연혁 및 문화 유적을 고찰해 보았다. 이것을 통하여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리게 될 토양의 여러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당시 천주교가 사상,종교,지역적으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이 지방에 뿌리 내리게 되었는가를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후에 무수한 박해 중 우리 선조들의순교와 신앙심 증거의 산실이되어온 것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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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배경
2. 천주교의 조선 전례
3.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4. 교회 창립과 언양지역 |
@언양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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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배경
1) 사회 상황
16세기초와 17세기말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그 이전에 이미 심각한 상태에 있던 조선 후기사회의 여러 영역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임진,병자의 양난으로 인한 노동력의 부족과 국가재정의 고갈은 농업기술향상과 생산성의 증가로 점차 극복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유휴노동력과 이농현상은 극소수의 부농과 대다수의 도시빈민을 낳게 되었다. 또 조세의 감소로 빚어진 국가재정 궁핍을 회복하기 위해 대동법이 실시되어상업자본 축적을 통한 상공업이발달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일부 거상(巨商)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해간 반면, 대다수의 백성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극심한 피폐와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중세의 신분질서를 급속히 붕괴시켜 나갔으니, 양반이 몰락하는 하향 과정뿐 아니라, 양인의 신분상승으로 인한 반상(班常)의 혼란이 뒤따라 발생하였으며, 더구나 도망과 해방 등으로 인해 노비의 수가 격감됨으로써 양반과 천민의 구분조차 점차 모호해져 갔다. 이렇게 양난 이후의 조선사회는 경제,사회영역이 근본적으로 동요되면서 중세의 붕괴와 근대의 태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세력은 이처럼 여러 분야에 걸쳐 발생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고 개혁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보장되었던 특권에 안주하여, 경직되고 보수적인 통치질서의 유지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즉 양반수의 증가와 관직의 부족으로 인해 정권쟁탈전을 불러 일으켰던 당쟁은 지리멸렬하여 사색을 형성하고 무수한 정변을 거치는 동안 잔인한 보복과 무자비한 숙청으로 인해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정치상황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왕권은약화되고 외척세력에 의한 장기집권이자주 일어났고 19세기초에 이르러서는 세도정권이 수립되었다.
세도정권은 국내의 진보세력을 숙청하고 백성에 대한 수탈을 일삼으면서 각종 민란 등의 저항운동을 탄압하였으나, 역사의 물결에 밀려나게 되고, 결국은 대원군의 쇄국주의 정책과 외세에 무력했던 민씨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이 땅은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게 되었다.
2) 성리학 체계의 동요
조선 후기에는 정치 현실뿐 아니라 지배 이념도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리학은 본래 우주 만물의 존재와 생성을 밝히는 관념적 철학 사상인 동시에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도덕 규범과 관련시켜 그 실현을 요구하는 실천적 학문이었다. 그런데 성리학에서의 모든 인간 관계는 충과 효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수직적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성리학에서는 명분론을 내세워 누구나 그 직분이나 신분에 있어서 '분'에 넘치는행위는 천리(天理)에 어긋나는것으로 여겼으며, 따라서 지배 계급인 양반층의 정통성과 봉건적 신분 질서의 확립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컨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지아비와 지어미, 주인과 노비 그리고 양반과 상민 사이의 지배 예속 관계가 절대시되었고, 그러한 관계를 밝히는 가르침으로서 삼강 오륜이 사회 규범으로 권장되고 교육되었다.이러한 성리학적 질서는 봉건 사회의 모순이 심히 노출되고 있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보다 강조되었다. 양반과 상민, 양민과 천민이 각기 엄격히 구분되고, 신분에 따른 질서가 법제화 되었으며 주인과 노비와의 관계는군신,부자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엄격히 고수되었다. 그리하여 성리학은 그 자체의 변화와 유동을 싫어하는 하나의 완결된 체계를 추진하여 봉건적 의례를 강요하였고, 혈연 집단의 유대를 통해서 문벌을 형성하고 그 바탕 위에서 양반으로서의 신분의 우위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봉건 사회가 해체되어감에 따라 성리학적 질서의 구조적 모순이 점차 첨예화되고 있었다. 붕당 사이의 극단적인 정쟁(政爭)으로 분열이 심화되면서 양반사회 안정의 기본 조건인 양반사회 자체의 세력 균형이 깨어짐으로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났으며, 이러한 변화에 대해 성리학은 특정 집단의 이론으로서 한층 더 교조화되어 일체의 상이한 견해나 주장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고, 봉건 사회의 폐단을 은폐하기위한 비현실적 가치관으로경직되어 갔다. 성리학 자체도 그 문제점을 드러내었으니, 과거제도가 온당하게 시행되지 못하면서 교육과 학문의 방향은 문장의 암송이나 기억에 치중하였고 논쟁의 초점도 이기론(理氣論)이나 예론(禮論)에 치우치게 되어 현실 문제를 외면하고 있었다. 당시의 백성들은 전란의 후유증과 정치의 부패 그리고 재난이 가중되면서 생활고에 신음하고 있었지만, 성리학은 그러한 현실에 적절히 대응할 사회 사상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신념체계로서 사회구조의 기본틀을 이루고 있던 성리학적 유교주의가 와해되고, 사회적 통합이 약화되어 사회질서의 유지가 어렵게 되자 이에 대처하는 여러가지 방법론이 대두되었다. 첫째는 기존 신념체계의 강화, 즉 성리학적 질서를 재확인.긍정함으로써 극복하자는 것과, 둘째로 기존의 신념체계를 수정보완하는 것, 세째는 기존의 신념체계를 대신한 새로운 신념체계의 확립을 지향하는 것 3가지 유형으로 나타났으며, 첫째의것은 주자학적 정통주의에 입각한것으로 후에 위정척사운동으로 전개되고, 둘째의 것은 실학운동으로 나타났으며, 세번째의 것은 19세기 부터 일어나는 신흥종교운동으로서 동학(東學),정역(正易), 증산교(甑山敎) 등을 들수 있다.
3) 실학의 발생
조선후기에 서학의 도입을 통해 전래된 천주교는 그 주체와 방법, 목적 등이 실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므로 천주교의 전래를 살펴봄에 있어서는 먼저 실학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앞서 살펴본 당시의 혼란과 변화에 대해 이를 수용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와 변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내적인 필요성에 대응하여 나타난 사상체계 중의 하나가 곧 실학이다. 실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의 붕괴현상과 이에 대한 경제, 사회적 변화를 직접적인 배경으로 삼으면서, 또 한편은 서학을 통한 천주교의 전래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학문적 영향을 외적 요소로 받아들였다. 즉 당시의실학자들은 청대의 강력한민본,민족의식,현실개혁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책을 통해 수학,천문학,농학과 같은 과학기술,그리고 천주교 신앙을 탐구하면서, 그것들을 부조리한 사회의 개혁을 위한 이념과 방법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있어서의 실학의 특성은 낡은 봉건적 전근대적 의식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근대 의식 내지는 근대지향 의식이었다. 실학은 또 동아시아적 세계주의인 중화문화(中華文化)의 영향을 받게 된 우리나라의 문화풍토를 반성하며, 반민족적 정신상태를 타파하고 민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민족의 존립과 번영을 추구하는 민족지향적 사상의 특징을 나타냈다.
현실을 중시하는 실학은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 또한 지대하였다. 기존 사회질서를 개편하고 사회발전을 열망하는 실학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과학기술과 접촉은 절실한 염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실학 사상가들에게 천주교는 그 이념적 근거를 제공해 주는 신념체계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천주교에 대한 연구는 이들 실학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근대사회로의 발전을 열망하는 이들 실학자들에 있어서도 천주교가 모든 이들에게 호의적으로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성리학적 배경에서 생활해 온 이들에게 유일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 내세의 구원 등을 강조하는 천주교는 대단히 이질적인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가톨릭 사상과의 문화접촉은 지식계층 사이에서 비교적 광범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에의귀의하는 문화 수용은 보다 제한된범위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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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주교의 조선 전래
1) 한역서학서의 도입
실학의 외적요인으로서 서학이 조선에 들어온 것은 16세기 초부터였으나 그때는 이질적인 두 사회간의 문화적인 접촉에 불과했으며,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비로소 실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학문의 대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수용의 방법이 된 '한역서학서'는 명말청초에 걸쳐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천주교를 전파하고 서양문명을 전수시키기 위해 번역 또는 저술한 종교, 윤리,지리,천문,과학,역사 그리고 기술관계의서적을 말한다. 한역서학서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는 기록은 선조시대의 학자인 이수광의 저서 [지봉유설]에 나온다. 이것에 따르자면 1603년 북경에 사행원으로 다녀온 이광정이 마태오 릿치가 제작한 세계 지도를 가지고 온 것으로 되어있다. 이수광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한역서학서에 대한 논평을 남긴 인물이었으며 그로부터 시작된 서학연구는 성호 이익을 거쳐, [천학문답]과 [천학고]를 지은 안정복이나, 논리적이고 사상성이 깊은 [서학변]을 저술한 신후담에 이르기까지 150년간 수많은학자들의 탐구로 이어진다. 한편 이들의 뒤를 이어 서학을 실천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운동의 중심인물들인된 이벽,이승훈, 권일신,정약종,정약용,이가환 등은 명나라 말기의 학자요 천주교인이던 이지조의 여러 작품을 독파하고 천주교의 사상에 이끌려 들어갔다.
이렇게 많은 서학서가 조선 후기 사회에 유포됨으로써 정조 초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안정복이 적고 있듯이, 서양서가 우리나라로 흘러들어 이름있는 선비들중 이를 읽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마치 제자서(諸子書)나 도(道),불서(佛書)와 같이 서재에 갖추어 두게 되었고, 또한 정약용이 실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서학서를 입수하여 탐독하는 일이 유행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서학에 대한 긍정적 이해는 마침내 천주교 실천운동을 촉구하여 천주교 신앙을 이 땅에 정착하게 하였다. 이로써 유.불 문화 세계인 조선에 이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이질 문화세계의 가치관을 담은 종교인 천주교가 수용되면서 조선 후기 사회는 새로운 사상과 만나게 되었다.
2) 서학의 실천
한역서학서의 수용은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려고 한 일종의 지적 운동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이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의 기존 제도와 질서,사회체제를 보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이러한 목적에서 한역서학서를 적극 수용하게 되었고, 학문적 연구를 뛰어넘어 이를 몸소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천주교회 창설 이전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그 결과 홍유한 같은경우는 이미 1770년대 초부터 신앙을 실천하고 있었으니 서학서를 통하여 7일마다 한번씩 주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스스로 주일을 정해서 실천하는 등 서학서를 통해서 자기가 체득한 그리스도교적인 윤리 규범을 따르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의 신앙과 신심 행위였으며 그것이 공동체적 성격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홍유한의 신앙 실천은 일종의 신문화 수용의 운동으로부터 종교 운동으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 과도기적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1770년대 후반기에는 강학(謹學)의 형태를 통해 천주교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당시 선비들의 경우에는 자주 모여서 학문적 주제를 서로 토론하는 강학, 즉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강학을 개최할 때는 도심을 떠나 한적한 산사를 찾아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서울이나 그 일대의 선비들이 주로 모였던 곳중의 하나가 바로 주어사, 천진암이었다.6) 이 강학 관계의기록, 그리고 이 강학에서천주교에 대한 서적 논의가 있었다는 점은 바로 주어사 강학을 통해서 처음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 강학의 기본 목적인 종교적 진리와 성리학적 가치를 재검토하였고 나아가 그 과정에서 천주교 서적에 관한 문제도 나왔고 천주교 서적에서 논하고 있는 여러가지 내용의 검토도 부분적으로 진행되었다. 1777년,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종교적 측면의 인식이 심화되었으니 단순한 서양의 문화 혹은 철학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천주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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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1) 교회 창립
앞서 말한 강학과 실천으로 천주교의 신앙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던 학자중의 하나인 이승훈은 그의 부친의 배려로 중국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그는 출국에 앞서 전부터 자주 상종하면서 더불어 서학을 논하던 이벽으로부터 서학 연구를 위한 자료구입의 부탁을 받았다. 그리하여 북경 체류시에 북당을 방문하여 그곳의 전교 성직자와 친분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천주교 입교를 자원하게 되었다. 북당의그라몽 신부는 그가 이미 천주교에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그의 열망이 결코 일시적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직접 확인하고 정식으로 그에게 베드로라는 본명을 주며 영세를 베풀었다.8)
이승훈은 정조 8년(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귀국하자 이벽이 찾아 왔고, 그가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교리서와 상본, 십자가 등을 건네 받았다. 이벽은 이들 한역 천주교리서를 집중적으로 검토한 끝에 이미 천진함, 주어사 강학회를 전후하여 그가 깨우칠 수 있었던 보유론적 천주 신앙의 이해를 굳히는 한편 천주교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천주 신앙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그의 집에서 권일신, 정약전,정약용 등과 더불어 이승훈으로부터 대세(代洗)를 받고 정식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의 한국 교회로 이어지는 신앙 공동체가 1784년 9월경 서울 수표교 근처의 이벽의 집에서 형성되었다.
이어 이들은 명례방(明禮坊) 소재 장악원(掌樂院) 앞의 중인 김범우의 집을 거점으로 정기적으로 신앙 집회를 가지게 되니,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2) 초기 교회의 성장
한편 서울에서 시작된 천주교 신앙운동은 충청도의 내포지방과 전라도로 확산되어 갔다.
이 시기의 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세 지도자가 있는데 앞에서 본 이승훈, 이벽, 권일신이다. 1785년에 들어 이들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 집회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첫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으니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형조에 잡혀 갔지만 모두 사대부이므로 훈방되었고 중인 출신인 김범우만이 귀양을 떠나 순교하였다.
이 을사추조적발사건을 제외하면 1784년에서 1801년 신유박해까지 15년간, 초창기의 천주교회는 비록 성직자 없이 창설되고 평신도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꾸준한 성장을 하였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의 신앙 자세는 자신들만의 구령이 아니라 이웃과 같이 하고자 하는 대승적인 신앙 자세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훈을 직접 실천하는 진취적 신앙 자세를 취하였다.그들은 자신들이난해한 한역 교리서를 통해 얻은 귀중한 신앙을 교양이 부족한 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초기부터 간추리고 집약된 교리서들을 편찬하여 책으로 간행하였고 또한 한역 교리서를 번역 간행했으며 열심한 신자들을 통해 일반인들의 전교에도 힘썼다.
한편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없이 학문으로 서학을 받아들여 천주교를 신앙으로 형성시켰던 당시의 교회지도자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가톨릭 신앙과 유교의 가르침을 조화시켜 보유론적 입장을 취했던 것처럼, 조상제사와 공자에 대한 존경의식을 버리지 않고 가톨릭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흡수,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갔으며, 이러한 태도는 지식층을 이론적으로 설복시키는 데 주효했을뿐 아니라, 조상숭배를 신앙처럼지켜온 일반 백성들에게도 환영을 받았다.
3) 초기 교회의 시련
1785년에 벌어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교회의 존재가 일반인들에게 공적으로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김범우가 유배 순교하고 양반 교인들이 심한 가족 박해로 고난을 겪는 등 초기 신앙 공동체는 시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탄압이 거듭되는 가운데 지도적 조직의 취약성을 통감하게 된 초기 교인들은 때마침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성직 조직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에 힘입어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을이루어 주교, 신부의 교계 제도를 조직하고 교회의 지도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 조직은 교회법으로는 명백히 위법이요, 불법적 성직 조직이었기에 교회법상 문제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적을 통해 얻은 부족한 교리 지식에 의해 생겨난 결과였으며, 그 이상의 개인적 야망이나 반교회적 목적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1년여 후에 교리의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 자율적 성직 조직에 대한 적부 여부에 회의를 품은 유항검의 이의 제기로 성사 집행을 중지하였다.
그 대신 북경 주교에 대해 성직자의 파송을 요청하는 성직자 영입 운동을 1790년부터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성직 조직은 교리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한 초기 한국 교회에서 신심.구령 활동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한 신앙의 열성에 기인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한편 한국 천주교회는 1791년 11월에 벌어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보유론적인 천주 신앙의 입장에 변화를 강요받게 되어 학문적 차원에서의 신앙 운동이 신심적 차원의 신앙으로 연결되었다. 즉 진산의 양반 명문인 윤지충 집안에서 모상(母喪)이 났을 때 윤지충이 취한 폐제 무주(廢祭無主, 전통적 유교적 제례를 거행치 않았고 신주를 모시지 않은 일)로 비난이 일게 되었다. 마침내 이 문제가 중앙정부에 알려져 유교적 전통 예교질서의 붕괴를 염려하게 된 국왕에 의해 윤지충과 그의 처사를 지지하던 권상연 등 두 교인이 순교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문제는 당시 동양의 전통 예식인 조상 제사에 대해 교황청이 취하고 있던 규정에 의한 잠정 조치로, 조상 제사를 금하고 있던 가르침에 순응하고 교인으로서 당연한 처사였으나, 유교적 예교 질서에 반하는 조치였기에 집권 세력을 자극하게 되었고, 결국 순교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 진산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학문적 차원에서 천주 신앙을 보유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초기 신도들의신앙에 변화가 오게 되었으니 천주교와 유교의 본질적 차이점이 조상 제사 문제로 차차 뚜렷해져, 천주 신앙과 조상 제사의 어느 쪽을 택일하여야 하는가 하는 중대 기로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학문적 차원에서, 보유론적으로 천주 신앙을 봉행해 오던 사대부 양반 교인 일부가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1791년 이후 신자들의 신분, 계급별 구성, 신앙공동체의 지역별 분포, 입교동기와 사상유형 등을 고찰해 보면, 초기의 창립이후 비교적 안정된 경제적 환경 속에서 교회를 이끌어 가던 양반 지식층들이 대거 탈락하여 축소된 반면, 박해 이후에는 중인이나 양인 또는 신분미상의 사람들이 교회 지도층으로 상승하였으며, 따라서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초기의 학문과 실천신앙 그리고 보 론적인 복합적성격으로부터 점차 복음 위주의실천신앙으로 심화되어 나갔다.
이렇게 신앙을 이유로 정부로부터 탄압과 박해를 받아 동요와 변화를 겪은 교회는 신앙보다는 국내 정치와 연관되어 또 다시 전국적인 박해를 받게되니 이것이 신유박해 1801년이다. 이 박해로 인해 교회는 중인계급 지도자의 상당수를 잃게 되고 상민을 비롯하여 경제적 조건이 극히 곤란한 이들로 유지되는 인적 변화와 더불어, 내적으로는 천주교 신앙이 이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내세지향적 성격을 한층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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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회 창립과 언양지역
1) 김범우의 유배와 언양지역
앞서 살펴본 을사추조적발사건(1785)으로 명례방(지금의 명동) 집주인이었던 김범우 (토마스)는 밀양 단장(丹場)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13) 또 이벽, 이승훈처럼 문중박해를 받은 서광수(徐光修)의 가정이 상주 이안으로 피난을 갔다. 이렇게 1784년 한국교회가 창립된지 겨우 1년후인 1785년 3월(음력)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말미암아 경상도 지방에 복음의 씨가 뿌려지기 시작하였다.
김범우(金範禹,토마스 1791- 1787)는 당시 역대 역관 벼슬을 한 부유한 중인(中人)집안에서 태어났으며 22세때 한학 역과에 합격하여 주부 벼슬을 하였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자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친형제인 아우,현우 그리고 중인의 친구들을 많이 권해서 입교시켰다. 그뿐 아니라 1784년 겨울부터는 명례방의 자기 집을 신앙 집회소로사용하게 하였다. 이처럼그는 불타는 신앙심으로 열렬히 신앙활동을 하던 중에 마침내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추조(형조)에 끌려가서 형조판서 앞에서 배교하라고 재촉을 받았으나 배교하기를 거부하였고 여러가지 고문을 당하고 귀양길에 올랐다. 그러나 귀양지에 가서도 계속하여 공공연하게 자기 종교를 신봉하였으며 큰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 그의 용기와 인내심은 잠시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귀양지에서 받은 상처의 악화로 2년후인 1787년 7월 16일(양력 9월 14일)에장하치명을 하였으니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그의 친형제인 이우와 현우도 신유박해(1801)때 서울에서 순교하였고 또한 그의 친척인 김언우(세막)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안동진영에 자수하여 그 이듬해에 대구감영에서 옥사하였다.
한편 김범우의 귀양지에 대해 문헌상으로는 지금까지는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때 함께 귀양지로 따라간 후손들의 증언과 서신, 호구단자, 족모, 가첩및 특별히 당시 그 부근인 언양,김해,장기 등이 모두 초창기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귀양 갔던 유배지임을 고려할 때 경상도 밀양 단장(丹場)을 단양으로 혼돈하여 잘못 기록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직계 후손들도 대대로 밀양 단장과 하동(下東, 지금의 삼량진)등지에 살았으며, 증손자 영희는 병인박해(1866-1873) 이후까지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사로운 박해(리델 주교 체포사건) 때문에 경북 성주군 금수면 웃수름재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새공소를 설립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11년경에 집안 사정으로 모두 냉담을 하였으며 1984년 그의 6대손인 김동환(만돌 토마)씨가부산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그후 이 밀양 단장과 하동(삼랑진)의 용전과 붉은 폭이,우곡 등이 옛날 신자촌이었다는 것이 문헌과 실제조사에서 속속 밝혀지고 있다.
2) 경상도 지역의 신앙 태동
한편 이 당시의 경상도 지역 상황을 살펴보면 서광수 가정에 의해 신앙의 신앙이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서광수(徐光修 1715-1786)의 가정도 당시 역대로 높은, 일찍이 벼슬을 하고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서울의 명문가정이었다. 특별히 문중(門中)의 서명응(徐命膺)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일찍부터 중국 북경을 드나들면서 박지원,홍대용 등과 함께 실사구시(實事求是 실제 생활에 있어서 옳음을 구함)의신학문에 힘썼다. 후손들이전하는 바에 의하면 서광수도 그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조용히 학문에 힘쓰며 살다가 일찍이 교회 창립시에 자녀들과 함께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여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때 문중(門中)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파적을 당한 채 추방되어 자녀들은 모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오남 유도(有道) 가정과 함께 상주 상서면 배묵리(상주군 이안면 양범리)로 피난하였다.
그의 장남 유홍(有弘)은 순천지방으로, 차남 유오(有五) 가정은 충청도 청풍으로 갔다가 후에 문경 여우목(문경군 문경읍 중평리)으로, 삼남 유만(有萬) 가정은 전라도 김제로, 사남 유원(有元) 가정은 충청도 공주로, 오남 유도(有道) 가정은 위에서 말한 바와같이 경상도 상주의 상서면 배묵리로 그의 부친인 서광수(徐光修)와 함께 피난을 왔으며, 육남 유필(有弼) 가정은 후에 천주교를 배교했는지 유일하게벼슬을 하여 남원 부사가 되었다.이렇게 해서 오남 유도(有道) 가정과 함께 경상도 상주지방으로 낙향한 서광수는 1년 후인 1786년에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에 아들 유도(有道) 가정은 몇년간 그곳에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여 부근의 은재(상주군 이안면 저음리 은재)에 살던 김 아가다 막달레나 가정, 사실(대현리)의 이응동 선대 가정 등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그러나 1801년(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유도(徐有道)의 가정은 부근의 문경 한실(문경군 마성면 상내리)로 피난을 갔고, 김 아가다 막달레나 가정은 청송 노래산의 새 신자촌으로 이사를갔었다. 그후 1813년에 서유도(徐有道)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그곳 한실에서 박해를 받아 상주로 잡혀와서 순교했다고 문중에서 전하고 있다. 한편 김 아가다 막달레나도 1815(을해) 박해 때 청송 노래산 신자촌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진영을 거쳐 대구감영으로 이송된 직후 옥중에서 심한 매질을 당해 순교하였다. 또한 서광수(徐光修)의 후손 중에는 차남 유오(有五) 집안의 자녀들인 증손자 서익순(徐翼淳)과 태순(泰淳) 및 친척 서유형(徐有亨) 베드로가 병인박해(1866-1873)
때 순교를 했으며 역시 증손자인 서인순(徐隣淳)도 1866년 병인박해 때 경산에서 포졸들에게 잡혀 대구감영에서 1868년에 옥사했다고 문중에서 전하고 있다. 또, 특별히 차남 유오(有五) 집안의 후손으로 그의 4대 후손인 서상돈(徐相暾 아우구스띠노 1850-1913)은 1886년 대구본당 설립시의 큰 공로자로 초대 김보록(바오로,프랑스인) 신부를 도와서 교회사업에 물심양면으로 전심전력을 다하였으며또 구한말 나라가 어지러울 때1907년 국가에서 일본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을사추조적발 사건 이후 김범우와 서광수의 가정에 의해서 경상도 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또한 제사문제로 일어난 1791년의 신해박해 후에는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이 지방으로 피난을 왔다. 그리고 1797년에는 황사영이 상주의 이복운(1776-1802)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으나 실패한 일이 있다. 1798년에는 이존창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한 황일광이 영남지방으로 이주해 왔었다.
3) 언양지역의 첫 신앙 공동체
한편 언양지방에는 해주 오씨 문중의 오한우(베드로)와 사촌 처남간인 경주 김씨 문중의 김교희(프란치스꼬)15)가 천주교 진리를 받아 들여 1790년경에 입교하였다.
오한우(베드로)는 역대 무관 벼슬을 한 명망이 높은 해주 오씨 가문의 자녀로 태어나서 부친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며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학문을 닦고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서 향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당시 공리공론만을 일삼고 파당의 투쟁론자가 된 성리학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학문인 실학에 눈을 뜬 후에 천주교 교리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처음 천주교 진리를 누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그 무렵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바로 인접 고을인 밀양 단장으로 귀양 온 김범우에 의해서 천주교 진리를 알게 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언양과 밀양 단장은 불과 100여리 남짓한 거리이며 또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범우는 역관 벼슬을 하였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귀양지에서도 계속 종교를 신봉하여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고 그의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오 베드로와 함께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인 김교희(프란치스꼬)가 김범우와 같은 경주 김씨 이기 때문에 더욱 교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하여 처음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인 그는 그후 서울을 드나들며 같은 오씨 문중인 오몽상(오기선 신부의 선대) 대감과 권일신, 정약용과 교분을 두텁게하고 천주실의와 교리서적 몇권을 얻어서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공부를 하였다. 그러자 부친이 이를 발견하고서 황당무계한 오랑캐 책으로 공부하는 것을 금하니 그는 부친의 명령을 온전히 거역할 수 없어서 부친에게는책을 불태웠다고 거짓 고하고사촌 처남인 김교희(프란치스꼬)에게 책을 비밀 보관토록 했다. 이렇게 해서 김교희(프란치스꼬)도 이 책들을 읽은 후에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리임을 깨닫고서 오한우와 함께 1790년 3월경에 서울로 가서 세례성사를 받고 돌아왔다. 오한우는 언양지방의 신앙의 반석이 된다는 뜻으로 세례명을 베드로로 하고 김교희는 전교를 담당하는 의미로 프란치스꼬(방지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언양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가 뿌려졌다.
이는 실로 한국천주교회 창립 6년후의 일로써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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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순교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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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2. 신유박해 - 정해박해
3. 정해박해 - 경신박해
4. 경신박해 - 문호개방
5. 순교의 결실 - 신앙의 자유 |
@언양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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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한국 천주교회 200년의 역사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전반 1세기는 이 땅에 교회의 토대를 굳히기 위해 온갖 시련을 겪어야 했던 박해시대였으며, 후반의 1세기는 자유로운 신앙 활동이 외적으로 보장되어 교회의 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던 자유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창립과 더불어 시작된 무수한 박해들은 "고대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하더라도19세기의 한국 천주교신자들이겪었던 만큼의 시련과 형고(刑苦)를 겪었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려울것"이라는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개인과 가족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대단히 참혹한 것이었다.
이러한 박해는 천주교가 전래될 당시 역사적인 배경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천주교 신앙 자체가 갖는 사회지배 이념과의 차이점 등의 요인이 빚어낸 것이었다. 나아가 순수한 종교적인 요인뿐 아니라 조선 후기 사회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과 연결되어 박해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박해로 강산이 악형과 학살의 피로 물들어 갔어도 반대로 교회는 기적적인 발전을 보였다. 이 기적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 중의 하나가 박해를 피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 공동체의 형성이었다. 일반적으로 '교우촌'(敎友村)이라고 불리는 신앙 공동체는 한국의 전통적인 공동체인 가족이나 친족을 중심으로 한 혈연 공동체, 또는 마을이나 고을을 중심으로 한지연 공동체와는 달리 신앙을 중심으로모인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선조들은 신앙을 키우고 실천하면서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고 모진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장에서 살펴볼 언양 지역의 신앙 공동체 역시 박해의 과정에 따라 확산 또는 약화 되었으며, 언양지역을 기준하여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신유박해에서 정해박해까지의 기간(1801-1827)을 보면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한우는 순교하고 김교희는 가정을 이끌고 간월산 불당골로 피신함으로써 언양지방의 첫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한편 신유박해로 탑곡으로 유배된 강이문에 의해 탑곡에서도 작으나마 신자촌이 형성되었고 또한 강이문에 의해 신자가 된 예씨 청년이 그의 가족과 그가 권하여 신자가 된 5,6세대와 함께 정착한 상필(예씨네골)에도 신자촌이 형성되었다.그리하여 언양에서는 내간월산 불당골, 탑곡, 상선필 등 세 곳에서 신자촌이 형성되어 서로 연락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 을해박해로 충청도, 경상도 등의 지방에서 신자
들이 피신을 와 이곳 3군데 신자촌에 정착함으로써 이 신자촌들은 더욱 커졌고 확실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827년의 정해 박해로 인하여 간월 신자촌까지 유린되어 김교희 가정은 경주지방으로 피신하게 되어 신앙 공동체가 약화되었다.
또 정해박해에서 경신박해까지의 기간(1827-1860)을 보면 1839년에 일어나 기해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탑곡, 상선필을 거쳐 간월과 대재에 우거하였다. 이때 김교희의 아들 김상은은 대재를 거쳐 국내 유일의 천연 석굴인 죽림굴에 있었으며 1840년경 충청도와 영남 각처에서 피신온 신자들이 움막집을 짓고 토기, 옹기, 숯을 구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해 대재 또한 간월과 같은큰 규모의 신자촌이 되었다.또한 최양업 신부의 전교 활동으로 내와,하선필 등지에 새로운 신자촌이 형성되어 언양지방의 신자들은 활발한 전교 활동과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60년의 경신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고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간월공소는 불태워져 버리고 대재 역시 공소기능을 살실하게 되어 언양지역 공동체는 다시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경신박해에서 문호개방의 시기(1860-1886)는 앞의 두 시기와는 반대로 침체기를 맞은 후에 신앙의 자유로 활기를 찾게되는 과정을 거친다. 즉 1866년 이후 거듭된 병인박해로 간월과 대재는 1868년에 해체되었으며, 간월과 대재가 해체되자 이곳의 신자들은 더 깊은 산골인 안살티로 모여 들어 살게 되었고 다른 곳에 피신했던 신자들도 박해가 심해지자 이곳으로 모여 새로운 신자촌을 형성하였다. 그후 이들은사기점으로 장소를 옮겼다가다시 박해가 끝날 무렵 현재의 살티공소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전국적인 박해가 점점 수그러들고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보장되기 시작하자 산 속에 숨어 지내던 신자들이 마을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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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유박해에서 정해박해까지 (1801 - 1827)
1) 폐허화된 초기교회
신앙선조들의 자발적인 강학 모임과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세례, 그리고 초기 교회 지도자들의 여러가지 노력은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이러한 발전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으로 이어져 한국교회의 성장에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죽고(1800) 그뒤를 이은 순조와 정순왕후의 섭정으로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마침내 전국적인 규모의 박해로 확산되었고 초기 교회에 엄청난 해악을 초래하였으니 이것이 1801년의 신유박해로 이어졌다. 이 박해로 인해 주문모 신부와 초기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 순교하였으며, 살아남은 신자들도 산간벽지로 피신하게 되었다.그후 폐허화된 교회를재건하려는 신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계속되었으니, 정하상,신대보를 비롯한 새로운 지도자들은 수시로 북경을 내왕하고 밀사를 파견하여 북경 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또한 1811년,1825년 두차례에 거쳐 로마 교황에게도 서한을 보내 그딱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한편 신유박해 때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그후에도 천주교 탄압에 대한 법적인 근거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잦은 박해를 일어나게 하였다. 특히 1814년 전국에서 기근이 들고, 이러한 상황에서 교우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들의 탐욕과 중앙의 지시없이 시작된 지방 관청의 탄압으로 을해년(1815)에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큰 박해가 일어났다. 이 박해가 외형상으로는 그 이듬해에 종결되었지만 100여명의교우가 체포되고 그중 30여명이순교하였으며, 살아남은 교우들도 재산을 약탈당하고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고, 특히 경상도와 강원도에 형성되어 있던 많은 교우촌이 파괴되었다.
1827년(정해)에 천주교인 밀고사건으로 또 한 차례의 박해가 일어났으니 전라도 곡성에서 시작된 이 박해는 전라도 전역과 경상도 상주(尙州)의 교우촌, 충청도와 서울 일부 지역으로 연결되어, 4개월 동안 50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15명만이 옥사 또는 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나머지 많은 이들은 배교한 뒤 석방되거나, 아니면 유배되었다.
이러한 신유박해(1801)부터 정해박해(1827)까지의 한국 교회사는 경상도지역 및 언양지역의 교회사와 신앙 공동체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01년부터 1827년을 한 단위로 구분되는 이 시기는 이 장에서 살펴볼 경상도 및 언양지역의 교회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신유박해(1801)와 을해박해(1815) 때 조선 전역과 경상도의 신앙공동체가 탄압과 박해를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언양지역의신앙 공동체는 크게확산되었다. 반대로 정해박해(1827)는 전라도 전역과 경상도,충청도,서울의 일부에만 약간의 피해를 끼쳤으나,언양의 여러 신자촌은 큰 피해를 입어 뿔뿔이 분산되며 약화되는 대조적인 현상을 가져왔다.
2) 경상도 지역의 신앙 태동
제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경상도 지방은 유학이 발달한 곳으로서 어떤 다른 사상이나 이념이 수용되기 힘든 지방색이 강한 곳이었다. 그러나 신유박해의 영향으로 타지방에서 살아남은 신자들이나 그 가족들이 경상도의 안동,영양,청송,진보 등 여러 곳으로 이주하였으며, 이들은 경상도 지역으로 귀양을 온 강이문(언양, 1801),이학규(김해, 1801),신흥권(고성, 1801),김노(진해, 1801),이치운(거제, 1801),정약용(장기,1801)등의 유배자들과함께 이 지역의 신앙공동체를 이루어나갔다. 물론 위의 내용들은 지금까지의 기록으로는 확인될 수 없는 것으로써 1815년의 을해박해와 1827년의 정해박해와 관련된 기록에서 유추된 것이며, 타지역의 박해로 피신해 온 신자들이 경상도의 산간지방으로 이주함으로써 복음의 씨앗이 경상도에 뿌려졌다는 가설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황사영 자신이 배론으로 가기 전에 예천(禮泉)에 들렀다는 기록이나, 윤우열이 경남 하동(河東)에 있는 천주교인들의 부락을 찾아 조처해 주기를바라는 상소등에서 이미 경남 지방에 까지 천주교가 전파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다음 단락의 언양지역의 신앙 공동체 발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최근의 여러 기록과 증언이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이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을해박해 당시의 교우촌 분포를 살펴보면 박해의 시발지인 청송 노래산(老來山)의 교우촌과 영양 고을의 곧은장에서 김경서(프란치스코)가 이룬 일월산중의 교우촌, 안동 우련밭의 산곡(山谷)에서 김종한(안드레아,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이 이룬 교우촌, 진보 교우촌, 청양고을 교우촌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을해박해 때 청송, 진보, 일월산, 우련밭에서 잡혀온 신자들은 경주와 안동진영을거쳐 대구감영으로이송되었으며 그 숫자는 100-200명이라고 전한다. 관변측의 기록으로는 대구감영의 이송자는 33명이고 그중 26명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옥사하고 나머지 7명은 참수당했다고 나타난다. 이때 순교했던 이들의 대부분은 충청도 출신으로서 경상도 동북부 산간 지역인 청송,진보,영양,안동 등지로 피신하여 살던 신자들이었다.
을해박해 이후에 살아남은 신자들은 소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내려와서 경주,울산,기장,영양,동래 등지로 이주하였다. 박해후 경상도 지방은 평온을 되찾았으며 사방으로 흩어진 신자들이 착실한 신앙생활을 한 결과 여러 신앙촌이 꾸준히 커나갔다. 또한 한국 교회도 교회 재건 운동과 성직자 재영입운동을 폈으며, 여러 문헌에서도 매우 밝고 활기차며 자유롭던 당시의 교회상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827년(정해) 전라도 곡성에서 신자끼리의 말다툼으로 시작된 밀고사건이 박해로 연결되어 전라도뿐 아니라 경상도와 충청도, 서울 일부에까지 확대되었다. 정해박해는 그해 2월부터 3개월동안 계속되어 5월에 신자들의 체포가 종식되었으나, 그동안 전라도의 모든 신자촌과 상주,안동,순흥 등의 경상도 신자촌, 단양 고을의 충청도 신자촌이 습격을 받았다.
이때 약 500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나 거의 모두가 배교하여 풀려났고 15명만이 옥사 또는 참수 순교하였는데 이는 그중 반수 가량이 예비신자에 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많은 신자 중에서 신부에게 한두 번의 성사를 받은 사람이 겨우 4,5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3) 간월 신앙 공동체의 형성 (1815년)
한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제 갓 복음의 씨가 떨어져서 자라기 시작한 언양지방에도 신유박해(1801)의 회오리 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 결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복음 전파에 힘쓰던 이 지방의 첫 신자인 오한우(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다니다가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의 경계지점인 충청도 어느 곳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고 문종이에 얼굴을 가리어 물을 뿌리는 백지사치명(피안살수형)을 당하여순교하였다. 그후 그의 시신은 순교한곳에 가매장 되었다가 20년이 지난 뒤에 그의 아들이 언양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해가 심해지자 그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김교희(프란치스꼬) 가정도 언양에서 조금 떨어진 깊은 산골의 내간월산 밑의 불당골로 피난을 갔으며, 또한 남은 오한우(베드로)의 가족들도 이곳 내간월에 이사를 와서 살았다. 그리하여 이들의 가정을 중심으로 이곳 내간월에 최초의 새로운 신자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편 신유박해(1801)중에 언양지방에는 주문모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서 입교한 강이문이 귀양을 왔으며 그는 곧 탑곡으로 옮겨졌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멀지않는 장기현(포항부근)에는 정약용이 귀양을 왔었다. 그런데 이때 경주 사람인 예씨 청년이 정약용을 찾아 갔더니 정약용이 그를 탑곡에 유배되어 있는 강이문을 소개하였다. 강이문을 통해 신자가 된 예씨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가서이웃과 친척들을 권면하였고 그결과 5,6세대가 입교하여 이들은 탑곡 인근의 깊은 산골인 상선필로 이주하여 살면서 신자촌을 이루었다. 한편 언양으로 귀양온 강이문과 예씨 청년의 개종에 관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동남쪽에 있는 도(道)의 저 안쪽에 떨어져 있는 한 교우집단에서 오늘 행해지고 있는 놀랍고 좋은 일을 대강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섭리의 손으로 땅에 뿌려진 겨자씨입니다. 1801년 한 신자가 굉장히 큰 산들로 다른 지역과 떨어져 있는 이 먼 지방에 귀양을 갔습니다. 그는 열심하고 능력이 있는 신입교우였습니다. 그의 의젓하고 규칙적인 행동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에게로쏠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때에는그의 돌봄으로 개종한 집안하나 밖에 들지 못하였습니다. 집안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첫 번째 집안이 또 다른 가족을 하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빨리 익지는 못했습니다.
"한 젊은이가 그의 고향에서부터 걸어서 여러 날 걸리는 간월이라는 마을에 독특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호기심에 끌려 그곳의 회장을 만나러 와서 이 거룩한 교리를 가르쳐 주기를 청했습니다. 회장은 그의 뜻에 의심을 품고 그의 소망을 들어주기를 거부하고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은 채 돌려보냈습니다. 젊은이는 얼마 후에 다시 공격을 시작해서 회장에게 다시 자기 마음이 진실함을증명하기 위해 전력으로 노력했습니다.쓸데없는 노력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한번 쫓겨갔다가 세 번째 다시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회장은 젊은이의 재촉에 못견디기도 했지만, 또 이 사람이 진리를 찾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설명해주며 조그마한 신심서와 기도서와 교리문답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이 예비신자는 너무나 기뻐하며 그에게 필요한 책을 직접 베꼈습니다. 그런 다음 이 귀중한 보물을 보유하게 되어, 집으로 돌 아가서 무엇보다도 먼저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과 온 가족을 자기가 방금 받은 진리의은혜에 참여시켰습니다. 그후에 그와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은 모두 천주교의 본분을 충분히 자유롭게 지킬 수 없는 고향 읍내를 떠나 간월 가까이에 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성사를 집행하러 갔을 때 이 사람은 세례 받을 준비를 완전히 갖춘 6명을 데리고 왔고, 자기 마을에 경당을 세우고, 내년에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 준비가 된 모든 가족을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대여섯 가족이 사는 또 다른 마을 하나도 같은 모양으로 개종하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하여 이곳 상선필에도 새로운 교우촌이 형성됨으로써 신유박해 후에 언양지방에는 내간월 불당골과 탑곡, 상선필 등 세 곳에서 신앙 공동체가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농사를 짓거나 옹기와 숯을 구우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한편 1815년에 이르러 일부 백성들의 탐욕과 지방 관청의 탄압으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을해박해로 말미암아 경상도 여러 지역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즉 박해 당시 도망을 했거나 관가에 체포되었다가 일시적으로 배교를 하고 풀려난 신자들도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서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신자들이 청송의이웃 고을인 영천지방과 청도지방과경주지방 및 언양지방의 깊은 산골로 숨어 들어서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었다. 즉 많은 신자들은 당시 경주지방 관할에 속했던 이곳 탑곡과 예씨골(상선필) 교우촌을 거쳐서 간월산 밑의 간월 교우촌으로 피난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미 1801년 신유박해 때 경주 김씨의 김교희(프란치스꼬) 가정과 순교자 오한우(베드로) 가정 등이 피난와서 살고 있던 간월에 새로이 이들 신자들이 많이 모여 들어 이제 간월 교우촌은 더욱 커졌고 확실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을해박해이후에도 충청도와 경상도 동북부 지방인 청송, 진보, 영양 등지에서 많은 신자들이 피신하여 상선필을 거쳐서 내간월 불당골에 정착함으로써 언양지역의 신앙공동체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정해년(1827)에 접어들자 전라도지역에서 신앙이 약한 신자들의 자백에 의해 정해박해가 시작되었고 이 박해의 불길은 이웃인 경상도 지방까지 번져 왔다. 그리하여 당시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신대보가 상주 잣골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끌려 갔으며 또한 그해 4월 말경에는 상주 고을의 4-5군데 신자촌이 습격을 받았다. 멍애목 신자촌에서(문경군 풍로면 명전리) 박보록과박사의 부자가 체포되고앵무당(상주군 화북면 평조리) 신자촌에서는 김사건과 안군심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또한 순흥이 고을 곰직이(봉화군 불야면 오전리)에서는 이재영이 체포되었다. 한편 순교자 김범우의 먼 친척인 김언우는 스스로 안동진영에 자수하였다.
이렇게 정해박해의 피해는 경상도 북부지방뿐 아니라 경상도 전역의 교우촌에 확산되었으며 이곳 간월 교우촌에도 모든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짐으로써 간월 교우촌은 약화되었다. 특히 김교희(프란치스꼬)의 가정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경주지방의 아화 모량리에 정착하여 살다가 1834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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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해박해에서 경신박해까지 (1827-1860)
1) 조선교구 설정과 교회의 발전
계속되는 박해로 한국 천주교회는 그 위세가 크게 약화되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의 순교하였고, 더욱이 주문모 신부마저 치명하자 한국교회는 이후 35년간 목자없는 교회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비참과 곤경 가운데서 남아있는 신자들은 다시금 교세를 키우기 위해 힘썼으니 사제를 영입하고자 북경에 연락을 하는가 하면 복음 전파를 위해 산간 벽지로 동분서주하였다. 그리하여1831년(순조 31년)에는 북경교구로부터분리되어 정식으로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었고 유방제,모방,샤스탕,앵베르 주교 등의 외국 선교사들이 차례로 입국하여 전교한 결과 교회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권 쟁탈이라는 정치적 배경과 결부되어 다시금 크나큰 박해를 받아야 했으니 이것이 1839년을 전후해서 일어난 기해박해였다. 이 박해는 1815년과 1827년의 국지적인 박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가져다 주었으며, 특히 서울과 경기도에서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 박해로 인해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모두 희생되었고,교회재건에 크게 기여하고있던 정하상, 유진길 등의 유능한 지도자를 잃게 되었다. 기해년의 박해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재차 사제 영입운동을 펼쳤으며, 마침내 1845년에는 한국인으로서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귀국으로 교회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함께 귀국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더불어 교회 재건을 위해 힘썼으나 이들 역시 이듬해 붙잡혀 순교의 길을 가야 했으니 정부의 박해 손길이 아직은 거세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 병오박해로 현석문,임치백 등 8명만이 순교하였고 그후로는 천주교 탄압에 강경하였던 풍양 조씨의 몰락으로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정부의 비교적 온건한 정책 속에서 교세를 키워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전반적 정책과는 달리 지방에서는 산발적인 박해가 일어나 탄압을 받았으며, 특히 1859년 말부터 1860년 8월에 거쳐 소수의 지방관리가 조정의 허락없이 서울과 지방의 신자촌을 급습함으로써 경신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는 조정의 반대와 장본인들의 파면,투옥된 신자들의 석방으로 9개월 간의 박해는 종식되었으나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의 어려움 속에서도 활성화되었던경상도및 언양지방의신앙 공동체에 큰 타격을 주었다.
2) 선교사들의 경남지역 선교
신유박해 이후 교회 재건 운동과 사제영입운동에 힘입어 조선대목구로 분리 설정된 한국교회는 모방(1836), 샤스땅(1837)신부를 맞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으며, 이중 샤스땅 신부는 남쪽 지방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샤스땅 신부는 1837년 홍병주와 홍영주(한국 천주교회 초기 지도자 중 한명인 홍낙민(바오로)의 2대손) 형제를 회장으로 임명하여칠곡 신나무골 신자촌에얼마동안 머물면서 성사를 집행하고 형제 회장으로 하여금 대구와 인근의 신자들을 돌보고 병자들을 방문케하고 또한 예비자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신나무골이란 말은 바로 당시에 샤스땅 신부가 회장들과 함께 나무 밑에서 움막을 치고 은신했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16) 또한 그는 청도 구룡공소와 경산 모래골 공소 등 선의산을 넘어 다니면서 경북 내륙지방의 교우촌을 순회하였고 언양과 밀양 등지의 신자촌들도 돌보았다. 나아가 그는 경상도 남쪽 지방인 부산 지방 부근의 신자촌에서도 열심으로포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활발하게 퍼져갔던 선교열도 1838년에 경상도 지역에서 박해가 시작되면서 크게 저하되고 교회는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박해에 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1838년 8월 꽤 심한 위기가 반도의 남쪽에 있는 교우촌을 뒤흔들어 놓았다. 40가량이 신자들이 붙잡히자, 다른 교우들은 추수할 것을 버려둔 채 도망을 하였다.그 지방의 수령은 이 사건이 예기치 않았던 규모로 확대되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그가 내렸던 무모한 명령을 후퇴하고 잡힌 신자들을거의 다 놓아 주었다. 그러나 주민 100명 이상이나 다른 도(道)로 이사하게 만들자 이 사실을알게 된 감사는 크게 노하여 그의 감영에 수령과 포졸들과 옥에 갇힌 채로 있던 신자 6,7명을 소환하였다. 밀고자는 귀양을 보내고 수령은 꾀많은 돈을 쓰고서야 무사히 되었다. 한편 신자들은 옥살이나 배교의 택일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불행히도 그때 신자들은 일시 배교를 하고 석방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해박해(1839)가 일어나기 1년 전에 발생한 이 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위의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100여명 이상의 신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여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신자촌이 유린되었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피신한 뒤였기에 정작 이듬해의 기해박해 때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경상도 교회의 피해는 적었다. 당시의 피해 상황을 보면 밀양의 단장과 웁실및 칠곡 신나무골등지의 신자촌이 파괴되거나없어졌고 반면에 칠곡의 한티와 언양의 간월공소 등은 새롭게 형성되거나 재건되었다. 이 때 순교자로는 1836년 김해진영에서 체포되어 대구에서 순교한 박대식(라우렌시오)와 1827년 상주에서 체포되어 13년 동안 대구감영에 갇혔다가 1839년 순교한 박사의(안드레아),김사건(안드레아),이재항(안드레아) 등이 있다. 한편 이 무렵에 부산 동래의 두구동에 살면서 불교를 열심히 심봉했던 최세영(시몬)이 불교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기 위해서 인도로 건너가서 3년동안 수학 한 후에 귀국하는 중에 청주에들렀다가 서양신부를 만나서 다시 2년간 교리를 배워서 영세 입교한후에 귀국하여 1837-8년전부터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다가 1839년 위의 기해박해를 만나서 부산 동래산성의 금곡으로 이사를 갔다(증언 박만선).
기해박해의 폭풍이 지나간 후 다시 평온을 되찾은 교회는 병오박해(1845) 때에도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9명의 순교로 박해가 일단락됨으로써 경상도 및 여타 지역에 큰 피해는 없었다. 더구나 1849년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1861년 죽을 때까지 12년간을 충청,전라,경상도를 맡아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꾸준히 교세를 확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860년에 일어났던 경신박해는 여러 요인으로 9개월만에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지역에 많은 피해를 끼쳤다. 많은 신자집단이 완전히 무너졌고, 신자들의 마음이 식어졌으며, 믿음도 약화되었고,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여 신앙을 버렸던 것이다. 외적인 피해 상황을 보면 17명의 신자가 체포되었고 그중 3명은 석방되고 2명은 서울로 압송되고 1명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10명은 경주감옥에 갇혔다. 이때칠곡 신나무골과 한티에도 많은 신자들이 피난갔으나 포졸들이 급습해서 신자촌이 완전히 유린되었다.
3) 간월공소의 발달과 해체
정해박해(1827)이후부터 경신박해(1860)까지의 언양지역의 교회상황은 발전기와 침체기로 나눌수 있다. 전자는 정해박해 이후 조선교구설정(1831)과 외국인 선교사들의 입국, 기해박해(1839)로 인한 타지역 신자들의 이주,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활동(1849-1861), 간월공소 건립(1858) 등의 요인에 의해 언양지역의 신앙공동체가 크게 활기를띠었던 시기이다. 반면 지역적으로발생한 경신박해 때에 언양의 여러 교우촌은 크게 약화되었다.
먼저 정해 박해(1827)가 끝나고 조선대목구로 설정(1831)된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맞이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동안 경상도 지역도 평온한 시기를 맞으며, 교세확장을 위해 노력하였고 특별한 박해나 탄압도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기해박해(1839) 이전의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가 남쪽 지방을 순회하며 전교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내외적인 요인에 힘입어 꾸준한 발전이 있었다고할 수 있다.
한편 1838년에 일어났던 경상도 지역의 박해는 기해박해(1839)의 서막으로서 경상도 지방의 거의 모든 신자촌들이 피해를 입었고 칠곡 신나무골에서 얼마간 머물면서 은신전교를 하던 샤스땅 신부와 홍병주,홍영주 형제 회장들도 도로 자기 고향인 충청도 내포지방 애사을로 갔으며, 그중 홍병주는 그곳에서 기해박해를 맞아 체포되어 이듬해 순교하였다. 한편 언양지방에서는 일년 뒤에불어 닥친 기해박해(1839)로 말미암아큰 혼란이 일어나고 많은 신자들의 이동이 있었다. 즉 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와 경북 일원에서 교난을 피해서 여러 세대가 신나무골,진목정,탑곡,예씨네골(상선필)을 거쳐서 간월과 대재(죽림굴,현 상북면 이천리)에 우거(寓居)했다. 그리하여 죽림(대재,죽령,죽림굴)공소는 간월공소와 같은 큰 규모의 공소가 되었다. 또 이때 일부 신자들은 양산의 범실(범곡,달밭골,월전),동래,기장,김해,삼랑진,정승골,가인 등지로 1,2세대씩 분산해서 피난을 하였고 탑곡 예씨네골(상 필),진목정 등지의 신자들은추격하는 포졸들에게 쫒겨서 간월과 죽림공소로 피난와서 살게 되었다.
박해가 끝난 뒤 1842년경에는 위의 간월과 죽림공소에서 피난을 했던 진목정, 탑곡 신자들중 일부가 고향으로 되돌아 갔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시작된 병오박해(1846)도 언양지역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1845년부터 시작된 다블뤼 신부와 그후의 최양업 신부의 간월공소 방문과 성사집행 등으로 언양지역 신앙열기를 크게 활성화시켰다.
"그래서 1837년 우리 동료들이 그 곳에서 성사를 집행했을 때 거기 있던 약간의 신자들이 다른 신자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종교적인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 교우집단과 가까이 있으려고 이사를 했습니다. 1839년에 박해가 아무 곳도 빼놓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흩어졌습니다. 그러자 어디에 발을붙일지 모르게 된 이들 가족중의 한 가족이 고향으로 돌아가 평온을 찾아냈습니다. 자기 의무에충실하고 성사도 받게 된 열심으로 가득찬 이 가족은 그의 신앙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하기는 사람들이 그 가족이 왜 이사를 갔었는지를 잘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은 친척들에게 다음에는 친구들에 게 천주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즉시 새로운 집단이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신자들과의 연락은 이따금씩 밖에는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은 마음으로 찾는 이에게는 천주 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매일같이 이 작은 양떼는 수효가 증가되고 열심이 더해졌습니다.그래서 1845년에 우리가 그 곳에 갔을 때에는 신자들 이 많은 중심지에 가까이 가려고 이사를 간 다른 많은 사람들을 빼고서도 예비 신자가 벌써 150명 가량이나 있었습니다. 8일내지 10일 동안 길을 걷는 것을 이 열심한 신입 교우들은 무서워 하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그들이 사는 산골에 갈 수가 없자 그들은 1846년에 2,30명씩 내게로 왔는데 그 중에는 여자도 몇명 있었습니다. 마치 딴 세상에서 온 것같은 이 형제들을 혹 내가 느낀 인상이 감동된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한층 더강 렬했습니다. 그 먼 지방의 본 바탕 성격인 것같이 생각되는 놀랄만큼 순박한 이 착한 사람들이 다정스런 마음씨에다 깊은 신앙과 몹시 굳센 정신을 곁들여 가지고 있었습니 다. 그들은 나를 다만 천주의 사신(使臣)으로만 보고 그들의 행복을 나타내는 눈물을 줄 곧 흘리고 있었습니다."
위의 서한 내용을 통해 1845년 이후 다블뤼 안 신부(후에 주교가 됨)를 비롯하여 최양업 신부가 이곳에 와서 성사를 집행하고 포교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지방의 온 고을이 거의 천주교 신자촌이 되었으며 그뿐 아니라 이러한 언양지방의 상세한 포교활동은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서도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서한중에 1857년에 로그레조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는그 무렵에 입교하여 범실공소를설립한 남주견 가정의 입교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떤 젊은이가 그의 읍내에서 여러날 걸리는 간월이라는 동네에 일반 종교와는 다른 색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알아 보려고 직접 그곳의 회장을 찾아와 그 좋은 교리를 가르쳐 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회장은 그의 본뜻을 모르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기를 원치 않았고 모른다고 핑계하고 그대로 돌려보냈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회장을 찾아가 그의 믿음의 진실함을증명하려고 온갖노력을 기울였으나소용이 없었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한번 거절당하고 세번째 또 찾아왔습니다. 마침내 회장은 젊은이의 재촉과 그 사람의 진실성에 확신을 갖게 되어 천주교의 기본교리를 설명해주고 기본교리서와 기도서와 교리문답을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바라던 진리를 알게 되었고 필요한 책들을 직접 베꼈습니다. 이렇게 대단히 귀중한 보물을 얻은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과 온 가족에게 같은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곧 그는 모든 사람들과 같이 천주교의 본분을 자유롭게 지킬 수 없는 장애 때문에 고향을 떠나 간월 가까이로이사 왔습니다. 내가 지난번 공소를 보러 갔을 때 이 사람은 영세 준비가 아주 잘된 6명의 어른을 강당으로 인도했고 또 내년에는 그의 집안을 모두 영세준비를 시키고 또 그의 마을에 강당을 세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섯 가족이 사는 또 다른 마을도 같은 모양으로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위에 나타난 남주견의 가정은 처음에 경남 의령에서 살다가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인 후에는 다른 몇 세대의 가정과 함께 간월공소 부근인 양산 범실(양산군 양산읍 호계리)에 이사와서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이후 1866년 병인박해 때는 박해를 피해서 청도 구룡공소에 피신해 갔다가 다시 범실과 살티공소에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언양지방, 특히 간월공소에 신자수가 크게 늘어 나자 마침 이 지방의 어떤 고마운 외교인이 새 강당의 건축을 위해서 헌금함으로써 1858-1859년 사이에는 간월공소의 새 강당을 짓고 촛대 등 화려한 장식품도 장만하였다. 이 새 강당은 전국적으로도 가장 훌륭한 강당이 되고 신자들은 이 새 공소에서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9년 10월에 최양업 신부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이기록되어 있다.
"간월이라는 공소에는 교우들이 상당히 많으나 모두 가난하여 강당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어떤 외인이 와보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집꼴이 이래서야 쓰겠는가?'고 말하며 자기가 하나 지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 외인은 자기 비용으로 훌륭한 강당을 지어 주었고 장식품으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이곳만큼 훌륭한 강당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정부당국의 공식적인 박해는 없었지만 아직도 일반인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천주교를 질투하거나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때 어떤 외교인이 선뜻 성금을 내어 교회건축을 하게 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며 한편 이것은 그 당시 언양지방의 좋은 신앙의 분위기를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일부 지방관리의 탐욕에서 시작되어 9개월만에 종식된 경신박해(1860)는 전국의 다른 지방과는 대조적으로 언양 지역의 신자촌에 많은 피해를 가져왔다. 즉 이때 간월공소는 불타버렸고 최양업 신부는 간월공소에서 순회전교를 하다가 박해를 만나 죽림굴에서 몇달간 숨어서 피신하는 등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또 간월의 교우촌은 언양과 경주포졸들의 합동작전으로 열심한 신자였던 오치문(吳致文1804-1861, 오한우(베드로)의3대손)은 순교를 했고 김상은(야고보, 김교희(프란치스꼬)의 아들)와 아들 김영제(베드로,1827-1876)는 투옥되었다. 김영제는 간월골에서 허인백(야고버)와 이 도마와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으며 허 야고보와 이 도마는 다시 울산 장대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처형되었고 김영제는 경주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수감되는 동안 심한 주뢰형의 고문을 받아 종지뼈가 떨어져 나가는 등 9개월 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때마침 국가에서는 경사가 있어 죄수를 방면해주는 특사로 김영제는 감옥에서 풀려나경북 '자인골'로 내려와 3년간 살다가 간월골에 살고있던 신자들이 이미 피신하고 있던 살티로 찾아가서 3년을 살다가 종지뼈가 떨어져나간 고통으로 인하여 1875년에 끝내 순교하였다. 또 순정공소의 김베드로도 대구 약영시에 갔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그리고 김해가 고향인 허인백(야고보)는 언양으로 이사와서 살다가 이 박해(1860)을 만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관가에 끌려갔으나, 돈을 내고 형벌만 받고 풀려 나왔고 그후 병인박해(1868) 때 다시 체포되어 순교를 했다.
이러한 경신박해(1860)의 언양지역 상황은 아래와 같은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수 마리아 요셉
죽림굴에서 1860년 9월 3일 리보아 신부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공경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에게 공동편지를 보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 편지를 두 뿐 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에게 보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박해의 풍파로 한 모퉁이에 갇혀서 신자들과 아무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어져 그들의 생사도 모릅니다. 이 편지도 중국에까지도착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박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알 수 없으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어 신부님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내 지방에서 17명이 체포되었는데, 남자가 14명, 여자가 3명입니다. 남은 신자들도 그의 다 그들 지방에서 쫓겨나 집과 전답과 가산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의지할 데도 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잡힌 신자들은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가정물건들은 포졸들이 약탈했거나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신자 친척이나 신자 친구들을 피신시켜 주었던 외교인들도 신자들과 같은 운명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동리의 주민들이 신자들 때문에 피해를입을까 두려워 신자들로 하여금 아무 데도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결의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잡아 가둘 수도 없고, 다 재판에 회부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포졸들을 여기저기 파견하여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또 외인들을 충동하여 신자들을 적발하게 합니다. 이 방법이 신자들에게는 더 가혹하고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체포된 17명 중 3명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왜 석방되었는지 원인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배교한 것 같습니다. 2명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1명은 대구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요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열심한 여신자가 하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천주교에 나오게 인도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노파는 체포되어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10명이 경주감옥에 갇혀 있는데 3명은 문초를 당할 때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고생하며 함구합니다. 그들 중 16세 된 소년이 있는데, 옥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24세된 동정녀가 있었는데,교리에 밝고 열심하여 모든 신자들 중에서 출중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를 원하더니 자기 부친과 다른 신자들이 체포될 때 포졸들한테 가서 자기도 같은 신자이니 잡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신자들의 만류로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거기서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포졸한테 가서 잡혀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때 이 동정녀가 가르치며 선생처럼 지도한 두 처녀를 묶어가지고 가다가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으므로 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처녀들을농락하고 나서 다른 데 팔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세 처녀들은 놓아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놓여 났습니다. 동정녀의 이름은 아가다였습니다. 아가다의 부친과 오빠가 감옥에 갇혔고, 집도, 갈 곳도 없어 방황하다가 마침내 내게로 왔습니다.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둘러있던 신자들과 같이 임종경의 마지막 말마디를 끝내자 아가다는 운명하였습니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하여 사방의 많은 외교인들 중에서 예비자들이 속출하므로 큰 위안과희망을 가졌습니다. 내 지방에서만도 예비자 수가 거의 1,000명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어떤 동네는 전체가 문답과 경문 배우는 데 경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박해로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없애기 위해 무장하고, 동리마다 신자들을 추방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인기는 몰락하고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자들은 실망하고,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배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까지 굳세게 용맹히 신앙을 지킨 신자들까지도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젊은 과부나 처녀들은 더욱큰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벌써 한 신자 과부가 외인한테 겁탈을 당하였고, 남편이 감옥에 갇힌 젊은 부인 한 사람과 처녀 한 사람도 겁탈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에 저들이 아직은 몸의 순결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신자 처녀들을 할 수 없이 외인과 정혼시켰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겁탈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조선교구 사제 최 토 마 올림"
한편 위의 서한집에 나타나는 김 아가다는 김상은(야고보)의 딸이며 오빠는 김영제(베드로)를 가리킨다. 최 신부의 서한 내용과는 달리 후손들은 김 아가다가 최 신부의 일을 돕고 죽림굴에서의 피신 생활동안 그 뒷바라지를 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 아가다는 최양업 신부가 죽림굴(간월산 일대)에 은신하여 전교하고 있을 때 3개월 동안 최 신부와 함께 동굴에서 기거하며 식사 빨래를 해드리면서 정보 연락도 하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최 도마 신부는 짚신을 삼았으며 교우들이 이것을 팔아양식을 구하여 생계를 마련해 고달픈 생활을 이어갔다. 이러던 어느날 김 아가다는 장질부사(염병)로 병사하자 최 신부는 직접 시체를솔가지로 덮어 굴앞에 뉘어두고 패장을 세워놓고 어디론가 떠나가버렸다. 며칠후 교우 3명이 굴을 찾아와서 그의 시체를 발견하고 간월골 집으로 옮겨와 3개월 동안 외변을 한 후 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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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신박해에서 문호개방까지 (1860-1886)
1) 격동기의 한국교회
이 시기의 한국사와 교회사는 세계사의 흐름과 변화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세계사는 제국주의 시대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즉 구미열강이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조밀한 미개발국을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시대이며, 이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국가간에 알력과 전쟁이 발생하는 시기였다.
한국은 1870년대 중반기까지도 구미열강의 세력권 밖에 있었으나, 점차 일본과 구미열강 그리고 러시아의 대외침략 정책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대원군은 자신의 봉건지배 체제로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와의 절연 속에서 보수적인 쇄국정책을 취하였으며, 그후에 집권한 민씨 정권은 아무런 대비없이 문호개방에 응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됨과동시에 가까운 일본의 상품시장과식량공급 기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구미열강에 대한 문호개방을 앞두고 국내의 정치세력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로 나뉘어 갈등을 일으키면서, 갑신정변(1884), 갑오개혁, 독립협회 결성 (1890)과 애국계몽 운동 등으로 근대화를 위한 시도를 전개해 나갈 때, 일반 백성들은 정치세력의 무관심과 억압에 대항하여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과 같은 무수한 농민항쟁과 민란을 통해 사회개혁을 부르짖었다.
한편 이 시기의 한국 교회사는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시작된 병오박해가 국내 세도정치 세력의 강력책과 구미열강의 통상요구 등과 맞물려 확대되었고 대원군의 집권(1863)과 러시아의 남하정책 및 중국의 북경조약(1860)등 국제정세로 인해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함으로써 수많은 신자들이 투옥,순교하였다. 이때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1868)과 신미양요(1871) 등으로인해 천주교에 대한 일반인과 정부의입장은 더욱 강경책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는 대원군이 실각하게 되는 1873년에 겨우 종식되었고 교회활동은 구미 열강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힘입어 묵인되어 갔으며 마침내 1886년 한불수호 통상조약에 의해 음성적인 선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가, 1889년 교민조약을 통하여 법률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
2) 경남지역의 급속한 복음 전파
경신박해 이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한국 교회는 꾸준히 발전을 하고 있었다. 다블뤼 주교는 1864년 여름까지 전교하다가 충청도로 전입되고, 그 후임으로는 경상도 서부 지방을 담당했던 깔레 신부와 충청도 동북부를 담당했던 리델 신부가 임명되어 경상도를 나누어 맡게 되었다. 그중 깔레 신부는 경상도 북부의 산협 지대를, 리델 신부는 경상도 북부 일부와 남부 일대를 맡았다.
그러나 병인년(1866)에 접어들면서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고, 그해 9월의 병인양요로 인해 교회는 많은 순교자를 내었으며 경상도에서는 북부의 대구, 문경, 상주 그리고 남부의 진영, 진주 등에서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 경상도 남부 지방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모두 3명으로 진영에서 교살당한 김사집(金士執, 필립보)과 진주에서 참수당한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 그리고 진주포졸에게 체포되어 매를 맞고순교한 구 다테오 등이었다. 그들은 모두 경남지방 출신으로서 이미 그 지방에 전파되었던 천주교의 교리에 이끌려 입교한 후 신앙 생활을 하던 중 체포된 사람들이었다.
한편 박해가 치열해지자 그해(1866년) 7월에는 그동안 피신해 있던 페롱 신부와 깔레 신부, 리델 신부의 합의결정에 따라 이 박해의 상황을 중국에 알리고 외부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리델 신부가 배로 조선을 탈출하여 천진으로 가서 당시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인 로즈(Roze)제독에게 조선에서의 박해상황을 알리게 되었다. 그 결과 그해(1866년)10월(음 8월) 로즈(Roze)제독이군함 7척을 거느리고 강화도를 점령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에 대한 책임을 묻는 소위 '병인양요'가 일어남으로써 농사철에 잠시 중단되었던 박해가 재차 시작되었고 이렇게 정치적인 사건과 맞물려 확대되었던 병인박해로 한국교회는 12명의 선교사 중 9명이 순교하고 나머지 3명도 조선을 떠나게 되어 다시 성직자 없는 공백기를 맞이하였으며, 신자들도 박해를 피해 산간 벽지로 피신해야했다. 그리고 1868년 4월(음)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원군의 부친인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이른바 '옵페르트(Oppert)사건'으로 다시 박해가 일어났으며 이때 나라에서는 가장 처참하고 극렬한 방법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또 1869년과 1870년에는 박해가 잠시 잠잠해졌다가 1871년 소위 '신미양요'로 다시 박해가 치열해졌으며 7년간의 이 박해는 1873년에 대원군이 정계에서 은퇴함으로써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그동안 천주교 신자는 8,000-20,000명이 순교를 했으며 경상도 지방에서도 1차 박해 때는 밀양 명례리에 살다가 체포된 신 마르꼬(이냐시오)와 김해 되실 사람인 김 베드로, 다른 김씨(본명,성명 미상)가 그해(1886) 2월 15일에 대구에서 순교했으며,26) 밀양 백산(밀양읍 하남읍 벽산리)출신인 오 야고보가 그해(1866년 3월 15일)에 대구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송이야기도그해(1866년) 9월경에 대구에서순교하였다. 그리고 진주에서는 같은 해 3,4월에 정대길이 순교를 하였는데 그는 본시 김해 유하면 관동 사람으로 그해 3,4월에 본음 포졸에게 잡혀 진주로 가서 순교했다.
그 후 선교사가 다시 입국하여 교세의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천주교 탄압의 기운은 여전하였다. 이때 대구에서 온 이윤일(의서, 요한)과 또한 그와 함께 상주옥에 갇혔다가 대구에 와서 치명한 문경 한실공소의 김회장 형제, 그리고 프랑스인 신부 3명과 평신도(정의배, 전장운, 최형) 등이 체포되었다. 또한 그뿐 아니라 본래 동래지역의 이요한 회장은 가족인 아들,이 방지거, 부인 박 마리아, 조카이 베드로, 교우 차 방지거, 양 말띠노, 옥 발바라 등과 함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기장으로 피난을 가서 3년동안 살다가 울산으로 이사를 와서 피신하였으며 동래 포졸에게 잡혀 통영으로 이송되어 가서 그해(1868년) 8월 14일에 8명이 함께 순교하였다. 이 무렵에 동래 사람인 다른 옥 발바라도 1868년에 잡혀서 이들과 함께 순교를 했다.
그후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을 비롯하여 조선이 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이 점차 유리하게 전개될 수 있었지만, 완전하게 보장된 활동의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경상도의 남부지방을 담당했던 선교사는 로베르 신부였는데, 그가 이 곳을 담당한 것은 1882년 이전부터였다. 다음에 있는 1883년의 '교세통계표'(敎勢統計表)에 이곳 신자들에대한 성사 집행의 결과가 자세히나타나 있다.
"로베르 신부에게 위임했던 경상도 지역은 금년에 특은을 받았습니다. 1,777명의 사규 고해성사자 외에도 215명의 성인들이 새로 탄생했습니다. 특히 이 지역에서 감탄할 만한 것은 구교우들이 돌아오고 있다는 뚜렷한 현상입니다. 로베르 신부도 19세 내지 22세 젊은이들 150명으로부터 고해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외교인들 중에서도 아주 많은 개종의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215명의 성인 영세자 외에 384명의예비자들이 있습니다. 외교인들자녀의 임종 대세자의 수만도 250명이며, 이들 중에서 216명은 그들의 부모들과 아직 우상 숭배의 어둠 속에 잠겨있는 동족을 위해 전구(轉求)하러 하느님 곁으로 갔습니다."
이 1884년의 보고서에 기록된 전교의 결과는 분명히 급속한 복음 전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무렵 블랑 보좌주교는 로베르 신부가 담당하고 있는 경상도 지역의 교세 확장을 위하여 한명 내지 두명의 선교사를 상주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로베르 신부로 하여금 이 지역을 전담시키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때까지 로베르 신부는 강원도 원주(原州)의 부엉골(지금의 경기도廬川群 康川面釜坪里)에 상주하면서먼 지역에까지 전교 순회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85년에 로베로 신부는 부엉골을 떠나 경상도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다. 경상도의 신자가 계속 증가하고 새로운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주하게 되자 블랑 주교는 그를 경상도 전담 선교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게 된 로베르 신부는 복사로 이호연(李浩然, 베드로)을 동반하고, 1885년말 경에 대구 근처인 칠곡의 신나무골로 이주하여 은둔 생활을 시작하였다. 신나무골에 정착한 그는 근처의한티(지금의 칠곡군 東明面 得明洞)와 새방골(新坊谷, 지금의 대구시 서구 上里洞과 竹田洞 일대)로 두루 다니면서 열심히 전교 활동을 하였고, 또한 경상도 남부에서도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로써 경남 일대에 흩어져 있던 신자들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당시 경남의 진주, 함안, 창원, 김해, 밀양, 양산, 기장, 언양, 경주, 청도, 경산, 삼가 등 남부 일대 전역에 퍼져있던 신자들이 점차 증가하였다. 로베르 신부는 그 당시 경상도 지역의 신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신앙 생활을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신앙면에서 모두가 신입교우들인 그들은 대개 열심합니다. 특히 외교인들을 개종시키는 데 감탄할 정도로 열성적입니다. 그들은 그로 인해 때때로 입게 될 수 있는 피해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다고 찾아 온 어떤 외교인은 자신의 영세 준비도 채 끝나기 전에, 서둘러 자기 아내나 이웃 등 측근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정도입니다. 간혹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용기를 잃지 않으며, 다른아는 교우들을 찾아가 상의하는한편,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집안에 있는 미신적인 물건들을 불태워 버리고, 죄지을 기회가 될 만한 사람들과는 설사 그들이 부모일지라도 관계를 끊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도 문제의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다른 곳으로 이사해 가는데 그때는 반드시 교우촌으로 갑니다."
한불조약이 비준된 이듬해, 즉 1888년 6월 12일에는 정식으로 프랑스 공사 플랑시가 서울에 주재하게 되자, 숨어 다니면서 전교를 하던 프랑스 선교사들도 차차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맞이하여 로베르 신부는 큰 도시로 전교를 확대시키기 위한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이나 여타의 개항지와는 달리 경상도 지방은 여전히 박해의 위험이도사리고 있어 섣불리 행동할수 없었다. 이에 그는 우선 대구에서 가까운 새방골에 초가집 하나를 매입하여 장차 대구로 진출할 터전을 삼았다. 그리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밤을 이용하여 대구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이렇게 대구 시내로의 진출을 도모하는 가운데서도 로베르 신부는 지방의 공소들을 방문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경북뿐 아니라 경남 일대의 공소들도 여전히 그의 방문을 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처음으로 거제도까지 건너가서 성사 집행을 하였으며 여기에서 많은 예비 신자들을 얻게되었다. 로베르 신부는 1889년 초까지 경상도의 전 지역과 충청도, 전라도 일부까지의 넓은 지역을 혼자 담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험한 산중에서 폐렴에 걸려 고생 끝에 겨우 건강을 회복한 적도 있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젊은 신부를 동반자로 맞이함으로써 그동안의 고통을 나누어 갖게 되었는데, 그 신부가 곧 훗날 부산본당의 첫 담임 신부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될 죠조(Jozeau, 趙得夏) 신부였다. 죠조 신부는 1889년 2월 16일에 서울에 도착한 후 잠시 한국말을 배우다가 3월 12일 이전에 경상도 지역의 담임신부로 차정되어 로베르 신부와 함께 신나무골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부산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약 1년 여 동안을 생활하면서 전교 활동에 힘썼다. 이때 그가 담당했던 지역은 경상도 북부 지방으로, 전교 결과 그는 성인 영세자 72명과 외교인 자녀 임종대세자 308명을 낼 수 있었으며, 전체 1,214명의 신자 중에서 863명에게 사구고해를 주고 769명에게 영성체를 줄 수 있었다. 경남 지방은 여전히 로베르 신부가 담당하여 전교 활동을 하였다.
3) 죽림굴과 안살티의 신앙 공동체
한편 이곳 언양지방에도 박해의 회오리 바람이 불어 닥쳐서 이 지역의 신앙공동체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먼저 간월 교우촌이 완전히 파괴되고 또한 신자들은 죽림이나 안살티, 두서, 두동및 멀리 청도 구룡과 경산 자인골로 피난을 떠났다. 즉 이때 언양지방에서는 신자들의 친척이나 다른 외교인의 밀고로 신자들의 재산도 몰수당했으며 그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위의 살티와 구룡(청도) 등지의 깊은 산골로도망을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경주 사람 김보윤(로무알도)은 이 교난을 만나 간월공소로 피난을 갔다가 죽림공소로 가서 거기서 다시 원동을 거쳐 영도섬에 정착했으며 그후 1891년 죠조 신부와 함께 부산 본당설립의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김사집은 마산 방면으로 피신갔다가 진영포교에게 잡혀서 고문으로 일시 배교했다. 그러나 다시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진영 포졸에게 자수하여 감금당하고 1867년 5월에 진영에서 순교했다. 또한 범실공소의 남주견 3형제 중 1명은 의령으로 피난을 갔고 1명은 양산으로 갔으며 남주견 본인은청도, 경산, 자인 큰골로 피난을 갔다가 후에 언양 안살티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범실공소의 강씨 두 형제는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리고 지난 1860년 경신박해 때 잡혔다가 풀려난 허인백도 다시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김종륜(루가), 이양등(베드로)와 함께 죽림공소에 피신해 있다가 다시 범굴을 찾아서 가족들을 옮기고 자신들은 목기 만드는 일을 하다가 체포되어 그해(1868년) 5월에 경주진영으로 끌려갔다가 8월 14일에 울산 장대에서 3명이 모두 함께 순교를 하였다. 또한 이때 이기수 신부의 증조부인 이 루도비꼬는 울산군웅촌면 금단에 살다가 박해를만나서 위의 3인 순교자와 함께 체포되어 관가에 끌려가다가 도중에 풀려나서 간월로 잠시 들렀다가 다시 안살티로 피난을 했다. 또한 이때 언양 율동(청양면 율리)에 살던 월성 이씨인 이기수 형제는 죽림으로 피난을 갔다가 그 곳에서 포졸들에게 잡혀서 울산 장대에서 교수형을 받아서 순교하였으며 그후 그 후손들은 밀양 가북으로 왔다가 다시 박해를 피해서 정승골로 갔다가 박해후에 가북으로 다시 돌아와서 살았다. 이렇듯 언양지방은 경신박해(1860년)와 병인박해(1866-1873)로 말미암아 많은 신자촌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박해 후에 피난갔던신자들이 다시 안살티로 모여들어서 새로운 큰 신자촌이 이곳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편 1877년 9월에 리델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로베르 김 신부는 처음엔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신학생을 가르치다가 1882년 부터는 경기도 지평 고시울에서 전교를 하면서 경상도 지방도 함께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3년에는 강원도 원주 부흥골로 옮겨 가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교세 통계(1882-1883년)에 의하면 이 사이에 로베르 신부는 1차로 경상도의 각 지방을순회 전교하기 시작했다. 그때그가 순회 전교한 신자촌의 교세현황은 다음과 같다. < ( )은 신자수>
칠곡 신나무골(48), 한티(39), 상주의 사설(116), 군위의 여진(69), 경산 모개골(31), 청도 구룡(60), 경주의 우중골(57), 새태골(67), 진목정(21), 선필(82), 밀양의 양천(27), 정성골(32), 기장의 남락(139), 김해의 노루목(40), 창원의 잉애터(24), 함양의 동천(71), 논실(39), 밤대(12), 진주의 소촌(78), 단성의 능구지(21), 삼가의 황개(23), 언양의 살티(38).
이렇게 김신부는 경상도에만 25개의 공소에서 940명에게 판공성사를 주었으며, 그때 신자수는(경상도) 1,568명이었다. 이 통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병인박해(1866-1873) 때 언양지방의 간월과 죽림 신자촌은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졌으며 대신 이 박해 중에 청도 구룡 등 사방으로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어서 살티공소와 선필에 신자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언양지방에는다시 교회 재건운동이 활발히일어났다. 한편 이때 로베로 신부는 우리 경상도뿐 아니라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일부 전라도 일부 등지까지 혼자서 험하고 먼길을 걸으면서 43개 신자촌을 방문하고 판공성사를 준 결과 과로로 쓰러져 장티부스에 걸려서 8일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의식을 겨우 회복한 후 그는 40일동안의 기도와 신자들의 병간호로 겨우 회복되었는데 그때 신부의 병환을 치료해 준 한의원은 당시 언양지방의 탑곡공소에 살던 박회장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 무렵 1884년에 언양지방에 범실공소와 반곡공소가새로 설립되었다.
이렇게 해서 로베로 김 신부는 1884년과 1885년에도 계속해서 강원도 원주 박흥골에 머물면서 경상도 지방에 순회전교를 하였다. 그러다가 1885년 12월 말에는 블랑 백주교의 명에 따라 경상도 칠곡 신나무골(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23번지)의 열심한 신자인 이이전(안드레아)댁에 안착하였고 경상도 지방의 사목을 위한 대구본당을 창립하고 첫 본당신부가 되었다.
대구본당이 설립된 후에도 김 신부는 이호연 복사와 함께 더욱 열심히 경상도 전역과 전라도 무주 등 일부 신자촌을 두루 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86년에는 우리 경상 남부지역인 함안의 토뫼(57), 논실(26), 밤대(14), 진주의 비라실(22), 소촌(65), 창원의 골내리(7), 곡목(36), 김해 노루목(30), 밀양의 정승골(38), 영천의 원(18), 청도의 구룡(48), 자인의 큰골(23), 하양의 북동(7),경산의 모개골(17), 경주의 내와(45),진목정(34), 우중골(30) 등에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이때 언양지방의 신자들도 경주의 내와 혹은 진목정, 우중골 및 밀양의 정성골로 가서 판공성사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해(1886년) 김 신부는 1,700여명의 신자들에게 사구성사를 주었고 또한 158명의 성인들에게 영세를 주었다.
또 그 이듬해인 1887년에는 김 신부가 34개 공소를 순방하고 1,000여명일 신자에게 사구성사를, 68명에게 세례성사를 주었다. 그때 경상도 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이닥쳐서 많은 희생자가 났으며 설상가상으로 콜레라가 도내 전역에 만연되어 경상감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거나 병을 앓았다. 그러나 이 어려운 때에 신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병자들의 간호와 죽은 이들의 장례식을 헌신적으로 치러줌으로써많은 외교인들이임종대세를 받고 사망했으며 또한 장례 후에 그 집안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입교하는 사례가 퍽 많았다.
한편 1888년 언양지방에서는 본당 설립을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어서 박해시대 때부터 많은 순교자를 내고 경상도 남부지방의 신앙의 요람지인 이곳에 본당이 설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강력히 그 추진운동을 폈다. 이때 앞장서서 추진한 이는 언양공소 회장인 박우양(가브리엘)과 선필회장인 김문익(안드레아)였으며 신자들은 회비를 거출했다. 당시의 언양지역과 인근 지역의 교우수를 살펴보면다음과 같다.
김해 노루목(37), 동래지역 범대(16), 절영도(15)), 동대(14), 언양읍(28), 살티(26), 내와(18), 선필(38). 이러한 당시의 교세 현황으로 보아 마땅히 이곳에 본당이 설립되는 것이 타당한 것이었다. 이렇게 개화기의 언양 지역 신앙 공동체는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발전을 이루었고, 이것이 부산 본당의 설립과 경남 지역 교회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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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순교의 결실, 신앙의 자유
개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천주교회사는 피어린 박해의 기록으로 시작되고 있다. 교회가 창설 초기부터 실천해온 신분의 귀천, 성별의 차대, 직업의 차별 등을 초월하는 평등과 사랑을 나누는 생활은 당시 주선 후기의 반상 체제(班常體制)를 무너뜨리고, 가부장 중심의 가족 제도를 흔들리게 하고 국왕에 대한 충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외부인 들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숱한 탄압과 박해가 교회를엄습하였고, 악형과 학살의 피를흘리며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박해도 신자들의 신앙심을 꺾기는커녕 교회 발전의 계기가 되었으니 박해가 거듭될수록 교회의 신도 수는 배가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비바람 속에서 모진 일을 숱하게 당하면서도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무수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교회는 힘차게 자라났던 것이다. 더욱이 박해의 시련 속에서 상당 기간 동안 의지해야 할 성직자도 없이 외롭고 버려진 상태에서교회는 빛났던 것이다. 하느님대전에 혈제(血祭)로써 신앙을 증거하고 기꺼이 숨져간 숭고한 순교 정신은 살아 남은 신자들에게 고귀한 교훈이 되었으며, 믿음을 갖지 않는 외부인 에게는 경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죽음 앞에서 천국의 문이 활짝 열렸음을 확신하고 자신만만하게 칼날이나 곤장 아래서, 또는 밧줄에 매달려 순교한 그 정신은 우리 교회에 크나큰 영향을 남겼다. 그것은 한국교회뿐 아니라 이곳 언양 지방의 신앙 공동체를 낳게 하고 확산시키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러한 언양 지방의 순교 선조들의 희생은 신앙의 자 를 가져오게 하였고,이제 교회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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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대적 배경과 한국교회
2. 경상도 지역의 교회발전
3. 부산본당 설립과 언양지역
4. 교세확장과 언양본당 설립 |
@언양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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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적 배경과 한국교회
1) 개화기
병인박해가 끝나고 개화기에 접어든 한국교회는 1882년 미국을 선두로 한 구미 열강과의 조약체결을 전후로 하여 천주교의 선교가 묵인되는 상태에 접어들었으며, 1882년의 한한학교(漢韓學校) 등 교육기관의 설립과 고아원, 양로원 등의 사회복지시설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위한 꾸준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또한 교세확장을 위한 성당의 설립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루어졌는데, 명동성당 건립을 위한 토지를 비밀히 매입(1883)하는등 전국 여러 지역에서 본당설립이이루어졌다. 이러한 내적 노력과 함께 1886년 한불조약을 통해 프랑스인에 대한 보호조문에 의거하여 선교사들의 여행과 활동이 보장되었으며, 이에 따라 본격적인 선교가 실시되었다.
한불조약 체결후부터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의해 외교권이 일본에 강탈당할 때까지 천주교에 대한 개인이나 사회집단 또는 지방관청에 의한 많은 탄압과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었으니 이를 교안(敎案)이라 한다. 이러한 교안의 원인으로는 교인들 사이의 분쟁과, 치외법권을 행사한 선교사들의 월권행위, 또는 지방 토착문화에 대한 몰이해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해결방법도 각 지역의 전교신부나 선교사가 주교나 선교본부에 연락하면그들은 국내의 외교공사관에외교적 절충을 요청하며 이에 따라 조선정부의 외부(外部)와 내부(內部)가 연락하여 검토한 결과를 현지 관료에게 지시하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과 지방관청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결국 교회는 국가와 교민조약(1889)을 체결하여 신앙의 자유를 법률적으로 보장받는 한편 신자들 역시 일반 백성과 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요약하면 개화기의 한국교회는 민족과 국가 전체가 외세의 침입과 근대화의 변혁운동 속에서 갈등과 고통를 겪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차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으면서 교세의 확장과 교회의 조직, 각종 사업의 추진 등을 전개함으로써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부의 공식적인 박해가 아니라 일반 백성들과 사회, 종교단체들과의 긴장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2) 일제시대
우리 민족에게 있어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36년동안의 일제 식민통치 기간은 민족사뿐 아니라 교회사의 관점에서도 신앙과 현실, 복음과 민족,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일제 36년은 한일합방(1910)에서 3.1운동(1919), 3.1운동 이후부터 만주사변(1931), 그리고 해방된 1945년까지의 세 시기로 구분되며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와 교회의 관계를 고찰하는 데는 당시 한국교회의 인적구성이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1910년 당시 교회의 현황을 보면, 70,000여명의 신자와 15명의 한국인 신부, 그리고 41명의 외국인 신부가 있었고, 교회 전체의 책임은 8대 교구장인 파리외방 전교회 뮈텔 주교였다.이러한 한국인과 외국인 신부의비율, 교회 책임자의 신분과 그에 따른 신앙유형 그리고 일제시대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상반된 태도 등을 고려할 때 프랑스인들로 구성된 교회 지도자들의 의사와 한국인 신자의 사고방식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세계사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한국 강점은 구미열강의 승인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본국 정부의 입장과 관련하여 같은 프랑스인으로서 선교사의 활동에는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으며, 파리외방 전교회 자체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정치불간섭주의를 내세웠다는 내적인 영향도 찾을 수 있다.더불어 교회창립 때부터 받아왔던박해가 신교의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 재현될 것을 우려한 요인도 있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일제의 침략정책에 악용되어 동조하는 결과를 낳아 교회와 민족사에 갈등과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내적으로는 교회 지도자와 일반 신자들간에 분열을 일으켜 결국 교회의 발전에 있어 장애와 제약의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사건(1909)이었다. 이 사건을 두고 뮈텔 주교는 안중근이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였고, 그에게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허락한빌렘 신부를 귀국 조치하였다. 또 3.1운동에 대해서도 단죄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여기에 가담한 신학생들에 대해 징계조치와 휴교령을 내리는 한편, 일본이 합법적인 정부이므로 이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대죄에 속한다고 강론하기도 하였다. 일제초기(1910-1919)의 교회현황을 보면, 대구가 대목구로 설정되어 파리외전의 드망즈 주교가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1911)신자의 연평균 증가율은 2.1%라는 저조한 기록을 나타내었다.한편 일제가 문화통치를 실시한 제2기(1919-1929)의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해 사회복지사업에 적극성을 띠면서각종 사회사업, 교육사업 및 언론출판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는 일제지배하에서 겪는 민족의 고통을 인식하고 동감하면서, 민족을 구원해야 한다는 구국사상을 고취시켜 나갔다.7) 또한 이 시기에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인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1925년 [교리교사 지침서]를 통해 확실한 이단임을 밝히며 명백히 금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제3기(1929-1945)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는 민족과 신앙을 외면하는 강압을 받았다. 먼저, 절대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혀온 신사참배 문제가 1936년 교황청의 허가와 일본 천주교 및 정부의 강요로 인해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태도로 바뀌었다. 이와 더불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1940년 '국민총력연맹'의 결성이 강요되자 교회는 이에 응하였으며,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신사참배를 시행하였으며 8)순교정신으로 일제의대륙침략전쟁을 위해 목숨을 다바쳐 순국하자고 주장하였다. 또 세부사항으로 매일 아침에 황실의 안태(安泰)와 무운장구, 동양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매주 무운장구를 비는 미사를 거행하며, 수시로 시국강연회를 열고, 국방헌금을 거두는 것 등을 일제의 전쟁수행에 대한 협조사항으로 제시하여 실천케 했다.
이러한 일제시대의 교회와 국가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당시 교회의 구성으로 볼 때, 외국인 선교사가 주축이 된 지도자층이라는 한계를 지닌 교회는 무단통치 기간중에 한편으로는 일제의 침략을 정교분리주의에 입각하여 당연시 내지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해방과 독립을 목표로 투쟁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후 일제의 문화통치가 실시되자 지도층과 신자들은 서로 협력하여이에 호응하였고, 따라서 각종의사회, 교육, 의료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한편, 대륙침략 기간에 이르러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교회는 국민총력연맹 등의 조직을 통해 일정하게 그들의 정책에 협력하였고, 이러한 교회의 일반적이며 전체적인 태도는 개신교와 대조를 이루면서 교회의 성장이나 신자의 수에 있어서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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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상도 지역의 교회발전
1) 대구본당의 설립(1886)
1877년에 입국하여 1882년말 충청도와 경상도의 담당사제로 파견된 로베르(Achille Paul Robert,1853-1922) 김 신부는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43개 공소를 사목하였으며, 1885년 말경에 대구본당의 설립이 결정되자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한편 그는 대구읍에서는 아직 양반들의 세력이 강하고 완고하여 공공연하게 포교 활동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고 비교적 평민계층이 살고 있던신나무골(현 칠곡군 지천면연화동)에 임시 거처를 정하였다. 신나무골은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충청도 등지에서 피난온 신자들이 모여 교우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으며, 1860년경부터 이이전(李苡全) 집안 등이 몇 대를 이어 살았다. 이로써 신나무골 교우촌은 대구교회의 요람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병인박해 후 10여년 동안 목자없이 간신히 생명을 유지해온 조선교회는 선교사들의 숨은 활동으로 서서히 복구되어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거제도에서는 윤경문(尹景文, 베드로), 봉문 형제를 중심으로 열심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동생 봉문은 스스로 열심히 수계하면서 사도 역할도 하는 한편 외교인들을 많이 모아놓고 경문과 교리를 가르친 결과 선교사가 방문할 무렵에는그중 15명이나 세례를 받을만큼준비되어 있었다. 마침내 로베로 신부가 온다는 소식에 교우들은 모두 모여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11) 로베로 신부는 1887년 겨울에 거제도를 방문하고 떠났으며, 몇달 후인 1888년 봄에 진목정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이 박해의 원인은 통영의 포졸들이 주금주(朱今周)라는 외교인을 체포하러 왔다가 자신들의 사사로운 탐욕을 채우려고 천주교 신자를 체포한 것에 있었다.12) 이때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4명으로 신자인 한필서(韓必西, 토마), 진요한, 윤봉문과 주남이라는 외교인이었다. 그중 윤봉문만이 특별히 지목되어 통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진주감영에서치명하게 되었는데 그는 곧 거제도에 최초로 천주교를 전파한 윤 스타니슬라오의 아들이었다.
로베로 신부는 윤봉문이 치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가 얼마나 열심한 교우였으며 얼마나 복음 전파에 열성적이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저는 운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으므로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미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아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으로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 나를 돕게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저에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것입니다."
이렇게 영남 지역에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언양에서는 1888년에 언양지역 본당설립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2) 언양지역 본당설립 추진위원회 조직 (1888년)
밖으로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국내의 정세는 미국,러시아,이탈리아 등 3국에게 전교를 금할 것을 요청하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 4명이 조선으로 진출하여 복음 전파에 힘을 쏟았다. 로베로 신부의 순회 활동에 힘입어 경상도는 성인 세례자 260명을 배출하는 등 꾸준한 교세 성장을 하고 있었다.
이에 언양지방 신자들은 역사를 상고하여 언젠가는 이 지방이 분리 독립하리라고 생각하고 이에 따라 1888년 각 지역 대표를 중심으로 본당설립을 위해 '지방 찬조 기성회'를 조직하고, 신부를 유치할 계획을 세웠다.
3) 부산지역 본당 설립 (1890년)
1889년 초까지 경상도의 전 지역과 충청도,전라도 일부까지의 넓은 지역을 혼자서 담당해야 했던 로베로 신부는 이 시기에 이르러 젊은 신부를 동반자로 맞이함으로써 그 동안의 어려움을 나누어 갖게 되었는데, 그 신부가 죠조(Jozeau,趙得夏)였다. 죠조 신부는 1889년 2월 16일 서울에 도착한 후 잠시 조선말을 배우다가 3월 12일 이전에 경상도 지역의 담임신부로 차정되어 로베로 신부와함께 대구 신나무골에 체류하였다.여기에서 그는 약 1년 동안을 섕활하면서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교 활동에 힘썼다.
경남지방은 여전히 로베로 신부가 담당하여 전교 활동을 하였는데, 2명의 신부가 경상도를 분담하여 활동하던 이 해에 경남의 함안(咸安)에서 장례예식 문제로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고, 이것이 교안(敎案)으로까지 확대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함안교안은 경상도 남부에서 일어난 최초의 교안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도 천주교인들에 대한 질시와사사로운 탄압은 계속되었지만,이전처럼 신자들이 배교를 강요당하거나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산 속으로 숨어들지는 않았다. 그만큼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보편화되어 이제 경상도에서의 복음 전파는 보다 쉽게 그리고 보다 빨리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인 1889년에는 경상도지방에 대구본당 다음으로 제 2의 본당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에 따라 1876년 한일수호조약 이후 개항되어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더욱 선교사들의 사목 활동이 자유로와진 부산과 언양지방이 새로운 본당의 후보지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신자수가 많고 박해시대 때부터 오랜 신자촌인 언양지방보다도 1887년 한불수호조약의 비준으로 더욱 포교의열기가 가득하고 또한 지리적으로보아 경상도 남쪽 지방의 전교를 담당하기에 편리한 부산지방에 새로운 본당을 설립키로 1889년 말과 1890년 초 사이에 당시 조선 7대 교구장인 블랑(Blanc,白圭三) 백 주교가 결정하였다.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블랑 주교가 부산을 근거지로 하여 경상도 남부를 독립시키고자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직접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경상도지방의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으며,또한 그 대상 지역이 넓어 로베로 신부 혼자서 담당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한불조약이 비준된 이후 개항지인 부산에서 선교사들이 자 롭게 대지를 매입하여성당 건축을 할 수 있었으며,외국과의 관문인 부산이 빠르게 발전할 소지가 있고,또한 호조를 발급받는 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전교활동을 할 수가 있는 지역이라는 관점에서 본당의 설립을 서둘렀다. 이리하여 블랑 주교는 본당 창설을 결정하고 그 첫 본당 신부로 죠조 신부를 임명하였다.
언양지방 신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지방 찬조 기성회'에 다소의 기본금을 적립하여 이를 점차 늘려나갈 것을 계획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중도에 적지 않은 실패를 당하여 잔존한 금액이 18원에 불과하였으나 신자들은 이러한 환경에도 낙심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특히 열성과 신망이 있는 언양회장 박우양(朴遇陽,가브리엘)과 선필회장 김문익(金文益,안드레아)을 선택하여 위원을 삼고 사업계획을 위임하였으며 두 사람은열렬한 성의로 진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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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산본당 설립과 언양지역
1) 절영도의 부산본당 (1890)
죠조 신부가 부산본당의 주임신부로 임명된 것은 그가 경상도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그가 젊고 유능하다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선 부산 시내에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쉽사리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렇게 죠조 신부가 부산으로 내려갈 시기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마침 절영도(絶影島, 지금의 影島)의 신자들이 신부를 맞이하려고 노력하여 기회가 마련되었다.
당시 절영도는 동래부(東萊府) 사중면(沙中面)에 속해 있었으며, 20여 세대가 흩어져 있던 벽지로, 숲이 울창하였고 부산항을 왕래할 때는 배를 이용해야만 하였다. 죠조 신부는 이렇게 부산 시내와 떨어져 있는 절영도에 호감이 갔으며 신자들이 살고 있는 곳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여 쾌히 승낙을 하였다.
본당설립을 위하여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 힘쓴 신자들은 당시 절영도의 조내기(潮落里, 지금의 靑鶴洞)공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증언 기록에 의하면 조내기 공소의 김보윤(로무알도) 회장이 신부를 영입하는 데 가장 힘을 썼다고 한다.14) 그는 1866년에 병인 박해가 일어나자 박해를 피하여 경주를 떠나 언양의 간월공소를 거쳐 절영도에 도착했던 인물로 공소를 설립하고 회장 직무를 수행하던 중 본당설립의통보를 받고 죠조 신부를 모시게되었던 것이다.
2) 대구대목구 설정 (1911. 4. 8)
1911년은 부산본당을 위해서 뿐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더 나아가서는 한국 천주교회 전체를 볼 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였다. 교황 비오 10세(1835- 1914)는 1911년 4월 8일자 교황 교서에서 조선대목구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2개 도를 분할하여 대구대목구를 설정하고 그 나머지 포교지를 경성대목구로 개칭한다고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대구대목구 초대 교구장에 드망즈(Florian Demange, 1911- 1938) 안 신부가 임명되어 6월 11일 주교로성품되었다. 이 당시 대구대목구에는24,694명의 신자와 18개의 본당과 391개의 공소에서 '파리외방 전교회' 사제 16명과 한국인 사제 5명이 전교하고 있었다. 대구대목구를 설정한 교황 비오 10세의 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무나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지역에서 주님 안에 더욱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있도록 현재 일본인들의 통치하에 있는 조선 전역을 하나의 대목구로 관할하고 있는 실정을 고려해, 특히 다행히도 신자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기에 각별한 열의와 지혜로 인해 밀로(Milo)의 명의주교이자 조선 포교지의 감목으로서 칭송받고 있는 존경하올 아우구스띠노 뮈델(Milo) 형제가 이 광대한 지역의 남부 지방에 새로운 대목구를 설정하는것이 시기에 적절하다고 건의해오고,우리의 공경하올 형제들인 로마 성교회의 추기경들이 그리스도교의 전파를 위해 이를 찬성해 주어서 하느님의 더 크신 영광과 신자들의 영신적 선익을 지향하는 이 건의에 대해 지대한 호감을 가지고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이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갖고 심사숙고해서 나의 사도적 전권과 현재의 권한으로 조선대목구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등 양도를 분리시켜이곳에 대구부의 명칭에 따르는 대목구를 설정하고, 이에 대한 모든 권리와 특전과영예를 부여하는 동시에 종래의 포교지에는 경성대목구라는 명칭을붙이는 바이다.그리고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 회원들이 1831년부터 이 지역에서 헌신해온 노고와피흘린 공로에 대해 치하하면서 조선의 남부지방에 설정된 새로운 대목구를 사목하도록 나의 권한으로써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 회원들에게 위탁하는 바이다.
이 교황령에 명시된 것처럼 대구대목구의 설정 배경과 목적을 보면, 첫째 새 교구가 설정된 것은 조선대목인 뮈텔 주교의 청원에 의한 것이며, 성좌(聖座)는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과 신자들의 영적 이익을 위해 이 건의를 받아들이고, 조선교구의 남부지방을 새 교구로 설정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둘째 새 교구의 지역은 경상도와 전라도이며, 새 교구의 명칭은 이 지방의 중심지인 대구부의 명칭을 따라 대구대목구로 하고, 종래의 조선교구는경성대목구로 그 명칭을 변경한다고하였다. 셋째로 새 교구인 대구교구의 사목도 지금까지 조선 포교지를 담당해온 '파리외방 전교회'에 맡긴다고 하였다.
대구대목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 주교가, 6월 26일 대구에 부임함으로써 대구대목구는 독립 교구로서의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부산본당도 새로운 교구와 교구장의 관할 아래에서 더욱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3) 언양지역의 교세확장
부산본당의 초대 담임신부로 임명된 죠조 신부는 아직도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여건하에서 교우들의 보호와 전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교세 통계표>에서 나타난것처럼 1891년에는 43명에 불과하던 성인 영세자가 1892년에는 75명으로 그리고 다음 해에는 거의 배가 되는 136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총교우수는 1,171명에서 1,370명으로 그리고 1893년에는 1,492명으로 점차 성장하는 추세를 보였다. 당시 죠조 신부가담당하고 있던 지역은 경남전체와 경북의 동남부 일대였다. 그가 순방한 지역은 모두 19개로 경남의 울산, 언양, 양산, 기장, 동래, 거제, 고성, 진주, 삼가, 함안, 창원, 김해, 밀양, 의령 등과 경북의 하야, 영천, 자인, 청도, 경주 등이었다. 부산의 제 6대 본당신부로 임명된 이는 르 쟝드르(Le Gendre,崔昌根) 신부였다. 르 쟝드르 신부의 재임 7년동안 부산본당에 속한 공소들의 전교 현황중 언양 관할을 살펴보기 위해 그가 해마다 뮈텔 주교에게 보고하는 성무집행 보고서 중에서 1903년과 1904년의 보고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살티공소는 조그만 곳이지만 훌륭하고 교육도 잘 이루어지고 있다. 살티와 언양 사이에 공소를 새로 설립해야 할 듯하다. 언양읍은 여러 곳의 신자들이 뒤섞여
있으나 읍내의 교우들이 가장 훌륭하다. 살티와 읍내 사이에 순정공소가 신설 되었는데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보고서에서 본 것과 같이 언양지방의 초기 신자들은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본받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차 교세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한편 부산본당의 제 8대 주임신부인 페셀 신부는 8년간 재임하는 동안 교세의 확대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또한 본당의 이전과 공소의 건축 그리고 부인회와 성가대를 창설하는 등 부산본당에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는 당시 언양 신자들의 활동도 왕성하게 하여 언양에 본당이 설립되는 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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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세확장과 언양본당 설립
1) 부산지방천주공교협회 창립 (1916. 1. 26)
페셀 신부는 부산본당에 부임하여 8년 재임동안 여러 가지 훌륭한 사업들을 실행하였다. 그중에서도 페셀 신부는 부산본당을 초량에서 지금의 범일동으로 옮겨 본당을 부산진본당으로 이전 개칭하였다. 이는 부산지역에 새로운 발전을 기약해준 것으로 의미가 깊은 것이었다.부산진본당으로 옮긴 페셀 신부는 그 이듬해인 1916년 1월 26일에 '부산지방 천주공교협회'를 창립하였는데, 그것은 각 공소회장과 평신도 대표들로 하여금 평신도 활동을조직화하고 교회의 재산 관리를맡도록 하는 제도였다.18) '부산지방 천주공교협회'는 신자들에게 신용 대부의 편의를 도모하기도 하고, 기금도 마련하였으며, 각 지방의 토지를 매입하여 소작료의 수입으로 재산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것은 교세의 확대와 함께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제도였다. 당시 '부산지방 천주공교협회'의 주축은 언양지방의 신자들이었는데 이것을 통해 언양 신자들의 활발한 활동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취지문과 규칙은 이 단체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취 지 서 -
조선에 성교회 창립 이후로 지후금 막대한 경비를 전부 서양인에게 의탁하야 오더니 홀연 개벽 이후로 제일 큰 전쟁이 구주에 발생하야 지금 우리의 은인들이 참혹한 환난을 당하는 중이니 이러므로 우리 조선 성교회 경비도 점점 곤난지경에 이르는도다.이때를 당하야 남의 은혜를 많이 입은 우리 조선 교우는 마땅히 어떻게 할꼬.사주구령(事主求靈)하는 중대한 일을 항상 남에게만 의지 하얏다가 남의 힘이 없을 때는 자파자멸(自罷自滅)하는것이 어찌 가하다하리오. 마땅히 은혜를 갚고 자주자영하는 것이 사람의 떳떳한 본분이요 책임이로다. 이러므로 금번 회장 피정시 한회를 조직하야 아래 규칙을 정하고 일각일시로는 할 수 없아오나 차차 그 목적을 달하게 하도록 힘쓰기로 각각자기 공소 교우를 대표하야 아래에 기명 날인함.
- 부산지방 천주공교협회 총칙 -
제 1조; 본회 명칭은 부산지방 천주공교협회라 명명함.
제 2조; 본회 위치는 부산부내에 둔다.
제 3조; 본회 목적은 본당경비 일부 혹은 전부를 보조 혹은 부담하기로 함.
제 4조; 본회 회원은 부산지방에 속한 교우 전부로써 조직함.
제 5조; 본 회원은 의무적으로 매년에 2전 이상으로 본회에 납부한다.
제 6조; 본회의 역원은 아래와 같이 둠.
회인 1인, 서기 1인, 재무 1인
제 7조; 역원의 책임 및 권한은 현행 사회 격식에 의함.
제 8조; 임원 선정법은 각 회장의 투표로 함.
제 9조; 총회는 매년 1차씩하되 회장 피정시로 작정함.
제10조; 부족한 규칙은 차후 마련함
1916년 1월 21일
본 회 창립회장 김 치 옥
- 서명날인자 -
영 도 ; 장도련 연 산 ; 김인화 웅 천 ; 김주영
문 동 ; 최묵수 임기,상곡 ; 김홍준 곡 천 ; 장치훈
양 정 ; 김명대 진 현 ; 백우익 경 주 ; 윤종의
빌 기 ; 김상곤 진목정 ; 김문학 하 단 ; 서취백
운 만 ; 김영기 명 호 ; 김득화 내 와 ; 최석규
탑 곡 ; 박장하 상선필 ; 박영숙 하선필 ; 김문익
순 정 ; 김병의 송 대 ; 최석규 언 양 ; 정영복
가 천 ; 허 철 대 석 ; 오봉재 호 계 ; 안효선
금 산 ; 신석순 대 리 ; 김선길 순 정 ; 김영휘
와 항 ; 황명선 덕 현 ; 남의손 범 곡 ; 김영필
(밑줄은 언양지역 공소 날인자)
2) 부산진본당의 정착과 분할
페셀 신부는 1923년 5월 말에 대구 남산정 주교관으로 이임되었고 그 후임으로 성 유스띠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5월 26일에 사제로 서품된 서정도(徐廷道,베르나르도) 신부가 제 9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부산진본당을 담임한 최초의 한국인 신부였다. 그는 서품된 이튿날 부산진본당에 임명되어 페셀 신부가 벌인 사업들을 정리,발전시키다가 1924년 10월 경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전임되었다.
당시 부산진본당의 지역 안에는 여러 공소에 성당이 설립되어 있었는데 공소의 성당중 최초로 건립된 곳은 1916년 2월 24일에 인가된 선필천주당(善弼天主堂, 울산군 두서면 인보리), 순정천주당(蓴亭天主堂, 울산군 상북면 길천리) 등이 있었다. 또한 이때 인가된 것으로 명례천주당(明禮天主堂, 밀양군 하남면 명례리)이 있었는데 이 성당은 당시 마산포본당(마산부 완월리) 소속의 공소였다. 물론 이러한 공소성당의 인가 과정에는 그 지방 신자들의노력이 대단히 컸으며 따라서그 결과는 지방 신자들의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서정도 신부 재임시 부산진본당에 설립되어 있던 공소성당은 선필,순정,대석, 영도,진목정,미호천주당 등 모두 6개에 이르게 되었다.
경상도 동남부지역 일대를 부산진본당에서 단독으로 관할하던 중 이 지역의 교세가 점차 확대되고 또한 1926년 5월 29일에는 11명의 신부들이 새로 탄생함에 따라 이 지역이 분할됨과 동시에 본당신부도 새로 차정되기에 이르렀다. 이 새로운 본당의 설정은 이 지역의 교회사에 있어 특히 두 가지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첫째 본당의 신설로 넓은 지역을 한 본당에서 관할하였던 것이 각 본당 관할지역으로 분할되었으며, 둘째 세분화된 각 본당지역에있어서는 각자의 교세 발전을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담당 지역의 축소화로 선교사들의 짐을 덜어 주는 것이 되고 그 결과 전교 활동이 보다 활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분할된 본당은 1926년 5월 30일에 설립된 경주본당이었다. 경주본당 지역이 분할됨에 따라 자연적으로 부산진본당의 관할 지역과 공소수가 축소되었다. 즉 부산진본당 관할 공소수는 1926년도에 35개 공소였던 것이 1927년도에는 28개 공소로 줄어들게 되었고 경주, 연일, 빌기, 진목정, 범곡, 정말, 와항 등 7개 공소는 경주본당 관할로 넘어갔다. 이로써 경상북도 지역의 공소들은 부산진본당관할에서 완전히 분리되었고 따라서 부산진본당은 경상남도 동부지역 일대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경주본당이 분할된 해인 1926년 12월 5일에는 다시 언양본당이 분할 독립되었다.21) 언양본당 관할로 들어간 지방은 경남지방에서 최초로 공소 설립을 보았던 지역의 하나로 일찍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생활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이미 선필천주당, 순정천주당, 대석천주당, 미호천주당 등의 공소성당들이 설립되어 있던 지역이기도 하였다.
경주본당의 분할로 경남의 동부 일대만을 관할하게 된 부산진본당의 지역에서 언양과 양산 일대 즉 월평,대석,범실,양산읍,금산,가천,언양읍,송대,순정,살티,상선필,석길,하선필,탑곡,율동, 굴화,초정 등의 17개 지역 공소들이 다시 언양본당의 관할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 결과 경남 동부지역은 이제 언양본당 그리고 부산, 기장, 김해 일부를 담당하는 부산진본당으로 크게 양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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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당 초기(1927~1940)
2. 본당 시련기(1940~1953)
3. 본당 중흥기(1954~1972)
4. 본당 근대기(1973~1982)
5. 본당 현대기(1983~현재) |
200년사 초기화면으로
@언양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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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본당 초기 (1927~1940)
-선교사 사목시대 (초대~3대)
가.본당 설립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산진본당의 제 10대 데랑(Louis Desrandes, 1924~1928 재임) 신부 재임 시기인 1927년에 언양본당이 분립되었다. 언양지역은 경남지방에서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곳으로 박해시대에는 신자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부터 산 속에 숨어 살던 신자들이 마을로 내려와 여러 공소를 형성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언양지방의 신자들은 본당 설립을 위해 각 공소 및 지역 대표를중심으로 '지방 찬조 기성회'를조직하여 재정적인 준비를 해나갔다. 그리하여 당시 송대공소로 사용하고 있던 박우양(가브리엘) 회장 댁과 인접한 천석꾼 김원이(?)의 넓은 가옥을 매입하여 공소와 사제관의 기틀을 마련하여 신부를 맞을 준비를 하였다. 또 성전 건립과 본당부지를 위해 1926년 11월 19일 2,200원으로 당시 이 지역의 이장이었던 박채용씨소유의 땅과 그외 여러 지역을 사들여 현재의 본당 터를 마련하였다.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에밀 보드뱅(Emile Beaudevin) 정 신부(1927. 5.25~1939. 3. 24.)는 1922년에 서품을 받고 1926년 한국에 입국하여 그해 12월 5일 드망즈주교에 의해 언양본당으로 내정되었고, 다음 해인 1927년 4월 4일에 언양본당 초대 주임 신부로 임명을 받아 5월 14일 정식으로 부임하였다. 정 신부는 5월 25일에 본당창설 기념 대미사를 가지고
(이사진은 원래 사진이아님)
P84 성당터를 둘러보고 있는 정 신부 일행(사진)
뒷편의 큰 기왓집이 천석꾼 김원이(?)로부터 구입한 공소이며 오른쪽의 건물이 사제관이다.앞쪽의 큰 초가집은 당시 이장이던 박채용씨의 집이고, 그뒤의 초가집이 이전에 공소로 사용되었던 박우양 회장댁이다.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는 한편, 부채를 갚고 부동산도 등기하는 등 성전 건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교구연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산본당 관할지 중 북쪽 부분은 부산본당에서 갈려나와 보드뱅 신부에게 맡겨졌는데 그는 언양읍에 새로운 거처를 정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는 '물질적 면에서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는데, 빚도 갚고 부동산 등기부에도 등록을 마쳤습니다'라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자신의 거처에서 그는 12명에게 영세를 주었으며, 22명의 예비자들을 준 비시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성당이 너무 비좁게 느껴져, 좀더 나은 성당을 생각하게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아주넓은 성당을 신축할 목적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P85 송대공소 당시의 신자 혼배 광경 (사진)
주례사제가 정 신부이며,당시 이장이었던 박채용씨의 장녀인 박두성(안나)의 혼배식이다
나.언양지방 천주공교협회의 창립
이렇게 언양지방에 본당이 창설되고 담당 신부가 내정되자 교회 운영 보조와 성전 건립을 위한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단체가 조직되었는데 이것이 '언양지방 천주공교협회'였다. 이 단체는 언양본당 설립 후 1928년 1월 6일 '부산지방 천주공교협회'에서 분리되어 같은 해 3월 3일 16개 공소의 회원 대표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래의 전교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조성할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아래의 기록에서 창립 당시의 상황을잘 알 수 있다.
「언양지방 천주공교협회 창립 회의록」
일 시: 1928년 3월 3일
장 소: 언양지방 천주교회
1928년 3월 3일 오후 8시에 송대본당 구내에서 변한준씨 사회하에 주모경 1차로 개회하다.
1. 변한준씨 개회사 겸 창립 취지의 설명이 있은 후 임시 의장급 서기 선거를 선언함에 박정탁씨로 부터 구두 호천함을 동의함에 만장일치로 찬동하고 김문익씨가 변한준씨가 공선되고 임시 서기에 김영근씨가 공선되다.
1. 출석회원을 점검하니 다음과 같더라.
언양: 한운필씨, 하선필: 김문익씨, 상선필: 김선태씨, 순정: 박정탁씨, 서하: 최홍수씨, 탑곡: 박인익 씨, 내와: 박근한씨, 양산: 변한준씨 이상 8분은 각 공소 회원대표로 출석하고 중산, 금산, 호계, 대석 4개 공소대표는 변한준씨, 송대는 박상식씨, 시현: 김명해씨 3씨가 출석한 외에 송대 오계영씨, 박세언씨, 조권득씨, 김영근씨, 강요셉씨,최남극씨 6씨가 출석하다. 합 20인이요, 가천,양정 2공소 대표는 결석 되었더라.
1. 전 협회 재산분배의 건에 입시의장이 전말을 보고함에 만장 이의 없이 승은되다.
1. 임시의장이 규칙을 낭독한 후 각 교목에 대한 회원 질문에 일일이 상세히 설명하고 일일이 기타의 유무를 물은 후 원만히 통과됨을 선포함에 만장이 이의 없이 가결되다.
1. 임원을 무계명 투표식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승인되다.
회 장: 박우양(가브리엘)
부회장: 오봉재(베드로)
총 무: 박정탁(베드로)
부총무: 한운필(다두)
재 무: 김문익(안드레아), 오봉재(베드로), 박정탁(베드로)
서 기: 박상식(바오로), 김영근(바오로), 변한준(프란치스꼬).
1. 본 회 경비에 대하여 변한준씨가 회원에게 회비를 정액하여 연수입으로 징수하여 회의 일부 경비라도 보충하기를 제의함에 박정탁씨가 개의하되 전 협회 의연금 모집시 일반교우가 경제에 피폐를 받 고 있는 죽, 한 일이 년간 본 회 경비는 적립금이 식중으로써 지불하게 하고 교우의 심안을 완화케 하여 경제를 회복하게 한 후 회비를 징수하든지 의연을모집하든지 하자 함에 김명해씨 동의에 김문익씨재청과 박인익씨 삼청으로 일이 개년 연기하기를 가결하였다.
1. 박정탕씨가 제의하되 전 협회에서 10년 동안 의연금 모집에 10회분 전부를 춸연 못 한것과 혹 의연록에 기재하고도 미수 또는 누락된 것을 빠짐없이 받자함에 박상식씨 동의에 김문익씨 재청, 김명해씨 삼청으로 가결되다.
1. 성당 건축에 대하여 김문익씨가 제의하되 현 성당은 심히 협찹하여 주일첨례시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당외에서 한서를 무릅쓰고 있을 뿐 아니라 성당내라고 하지만은 복잡함을 난감하니 우리는 미성적으로 우선 식리중으로 일시의 미라도 전집하여 보자함에 한운필씨 동의에 박상식씨 재청, 김성태씨 삼청으로 가결되다.
1. 본 협회 재산 분배에 대하여 약 오산이 유할시는 어찌고자 합니까? 박선언씨가 의견을 제출함에 박정탁씨로 부터 그것은 간부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처리케 하자함에 변한준씨 재청에 한운필씨 삼청이 있으므로 간부회에 일임하기고 가결되다.
박정탁씨로부터 폐회하기로 제의함에 김문익씨 동의와 한운필씨 재청이 유하므로 임시 회장이 폐회 를 선언하고 주모경 1차로 폐회하니 오후 11시 반이더라.
'언양지방 천주공교협회'는 본당 유지비 집행, 성당건축 기간의 건축비 지원 및 노력 봉사 등 초기 본당 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으며 당시 전국 각 본당의 귀감이 되는 평신도 단체였다.1928년 9월1일자의 '카톨릭 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로 이 협회의 창립을 축하 하였다.
"언양 천주공교협회 창립을 축하하며"
-십만 교형 제씨의 각성을 촉함-
장래의 전교사업 재원을 조성할 목족으로 지난 3월3일에 언양지방에서(송대 정 신부 본당)천주공교협회가 창립되었다.우리는 충심으로 동회의 출생을 축하하며 전도융융하기를 빌고 아울러 동회의 목적과 취지를 반도전폭에 널리 소개하여 십여만 교형 제씨의 각성을 촉진하는 바이다.이에 동회의 창립된 동기와 목적을 소개하자면 자연 10년전 옛날 이야기가 되고만다.
거금 십여 년 전 조선성교회가 이다지 발전되기전에 부산지방에서 넉넉지 못한 우리의 경제는 날로 파멸을 당할뿐으로 전교상 허다한 사업이 목전에 둔 채 되었으나 하등의 구책이 없음을 통탄히 여기고 유지 제씨가 분기하여 장래의 사업자금을 조성하고저 본당 관할소속 30여 공소 남녀 교우 전체를 회원으로 하고 부산협회를 조직하고 해마다 매 명에 일정한 금액을 각 공소에서수합하며 일변으로 유지제씨의 특연금을 수합하여 이래 십여년간저축한 금액이 만여원에 달하였던 바 작년에 안양본당이 설립되어 지방이 분할됨에 따라 두 지방이 협의한 결과 자금을 분배하여 협회가 분립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십여년 역사를 가진 반도에 유일무이한 부산협회의 자매인 언양협회의 창립이다.장하고 놀라운 동 회의 창립된 동기와 특수한 그 조직이며 철저한 그 주의와 열려한 그 실현 모든 것이 기발하고 장함에는 누구나 다 감탄할 것이오 경하할 바이로다.
십만 대중이여 묻노니 조선 성교회의 전교사업에 우리의 힘으로 담당한 것이 무엇인가?
사업은 고사하고 성교회의 1분자로 교우된 의무 부담을 얼마나 하렸는가 불과 1년에 30전 내외에 지나지 못하였고 이것이나마 충실치 못하였다. 이것으로 현재의 모든 시설과 막대한 그 비용이 될 것인가? 오늘날 반도천지에 시설된 모든 전도기관이 누구의 힘으로 되었는지 살펴보라. 전부가 파리외방전교회의 전력이오, 구미 각국 교우들의 조선을 사랑하는 애긍으로 된 것이 아닌가?
우리의 힘으로 된 것도 다소간 있기는 하나 어디없이 항상 넉넉한 분들이 한 것이오 따라서 대소사를 물론하고 항상 넉넉한 모모씨가 하리라는 의뢰만 하여왔고 심하면 원망을 돌리었다.
3) 성전건축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대 본당 신부인 보드뱅 신부는 5월 25일 본당창설 기념미사후 성전 건축을 위한 계획을 밝히고 1928년 '언양지방 천주공교협회'를 창립하여 모금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 신부는 오랜 피난살이를 한 당시 신자들의 경제적 한계를 파악하여 성전이나 본당 기관 설립을 위한 비용 모금이 불가능함을 알고 생활비의 절약과 본국의 은인들, 특히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의 지원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정 신부 스스로 2차에 걸친 성전건축 설계를 하고 1928년 5월 25일 성전 및 사제관 신축 기공식을 하게 되었다. 이 공사는 서울 명동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이 곳 신자들은 정해진 날에 와서 부역을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송대 뒷편에 있는 화장산의 남서쪽 낮은 언덕에서 화강암이 발견되어 성전 건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부족한 공사비로 인해 자주 공사가 중단되고 외국으로부터 자금이 들어오면 재개되는 몇 차례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6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보드뱅 신부와 신자들의 피나는노력으로 성전이 완공되어 1932년 8월 15일 본당 준공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1936년 10월 25일 주보 성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왕 축일에 다시 드망즈 안 주교의 주례로 성전 및 사제관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교인과 외교인을 비롯하여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참석하였으며, 이 거룩한 예식에 감동되어 극구 찬양하며 경의를 표하였다. 성당이 건축되기까지의 과정이 아래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언양 지방에도 성당 건축 (경햔잡지 영인본 30권 제843호, 1936년12월 12일자)
P91 공사중에 있는 언양성당, 1930년경(사진)
언양성당은 고딕식 형태로 제작된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 건물이다. 성전 자체는 다음의 단면도에서 나타나듯이 미완성된 라틴 크로스형의 평면이며, 현재는 성전의 정면과 측면이 석재로 마감되어 있는 반면 뒷벽은 벽돌로 처리되어 있다. 이러한 불완전한 성전 구조는 미래에 신자수가 증가될 것에 대비하여 용이하게 증축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며 또한 성전 건축 당시 어려웠던 재정 사정 등으로 성당을 완성시키지 못했던 상황을잘 반영하고 있다.
4) 학교의 설립과 교회 묘지의 신설 P92 평면도
일본의 조선 총독부는 1922년 2월 28일 사립학교 규칙 개정령을 관보에 공포하여 정규 교과과정에 종교교육을 포함시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 결과 교회학교의 운영이 어렵게 되자 그해 8월 15일 드망즈 주교는 교육에 관한 '효유서'를 반포하여 교회학교가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공립학교들 보다 빈약한 예산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지만 가톨릭학교 운영의 정신에 입각해 어려운 처지를 극복해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학교관계법률에 따르면 학교를 인가받기위해서는 많은 수의 교사를 채용해야 되고 그럴 경우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총독부의 인가를 포기하고 그냥 학교를 꾸려나간 경우도 많았다. 또한 총독부의 계획안에 따르면 3,4년제 소학교들은 6년제 보통학교의 학칙을 따르지 않아도 되고, 6년제 보통학교에서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도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수가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보드뱅 신부는 본당 신축과 함께 학교 설립과 교회 묘지의 신설을 계획하였다. 그가 설립한 학교는 조촐하게 이루어진 여러개의 학교였는데, 비록 규모는 작으나 차차 조선인들에게인정을 받게 되었다. 학교 설립에 관한 당시의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보드뱅(BEAUDEVIN, 丁) 신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언양에서 여러 개의 학교가 문을 열었는데, 아주 조촐합니다. 하지만 학교가 조촐하다는 것은 불만스러워 할 일이 못 됩니다. 조선사람들이 양극단, 즉 웅장한 학교와 아주 보잘 것 없는 학교 사이의 중간은 생각해 보지 않으려 하는 편견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드뱅 정신부는 당초 정규학교 설립을 계획하였으나 여건이 되지않아 문맹자 퇴치운동 차원에서 미인가 간이학교를 운영하였는데, 여러 공소에서도 운영되었다고 한다. 묘지 건립의 문제 역시 온갖 난관에 부딪혀 쉽게 이룩되지 못하였으나 그가 이러한 사업을 실천한 것은 훌륭한 전교의 수단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양본당은 1930년대에 이르러 교세가 크게 저하되었으며 그 이유는 가난과 채무로 인한 이주민의증가 때문이었다. 물론 남아있는신자들은 열성을 더했지만 재고백 성사자가 500명, 재영성체자가 2,000명이던 1930년의 교세현황이 한두 해가 지나면서 채권자를 피해 이주한 교우수가 점점 늘어났다. 한편 보드뱅 신부가 사제관 및 성전 건축 등 많은 일을 하고 재임 12년 10개월만에 대구 교구의 부주교 및 경리부장으로 전임된 후 부임한 제2대 코르데스(Marius Cordesse) 공신부(1939. 4. 30~1940. 4. 11.)는 1년간 전교 사업에 힘쓰다 전임되었다. 그리고 제 3대 프르와드보(Raymond Froidevaux) 조 신부(1945. 5 1.~1940. 9.)는 어린이 전교에 힘썼으며 울산에 성당을 설립하려 애쓰다가일본에게 첩자로 오인받아 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일하다가 전임되었고 그 이후로는 방인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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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본당의 시련기 (1940~1953)
- 방인 사제 사목의 시작 (4대~7대) -
1) 방인 사제의 사목과 교회활동의 위축
부산지역의 본당 분할 이후 각 본당에서는 그 지역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또한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났는데, 언양은 제3대 프르와드보 신부에 이어 1940년 9월에 제4대 주임으로 정수길(요셉) 신부를 맞이하여 드디어 방인 사제의 사목을 받게 되었다. 외국인 신부의 사목을 받던 신자들은 방인 신부의 사목을 받음으로써 더욱 신앙생활에 활기를 띠게 되었고 첫 방인 신부로 부임한 정수길 신부는 내적 신심활동을 양양키 위해신심단체를 조직하는 데 힘을기울였다. 그 결과 1940년 10월에 성가대가 조직되었고 1941년 4월에는 어린이들의 교리학습을 촉진시키기 위한 교리 시험대회가 열렸다.
경남 울산군 언양면 송대리 교회에서는 소년 소녀들의 문답 공부와 교리연구를 촉진시키고자 거년추기 전교 때 본당신부로부터 장차 교리 시험대회가 있을 것이 언명된 후 모든 소년 소녀들이 열심으로 공부하여 오던 주이더니 마침내 지난 부활첨례날 오후 한시 반부터 선발된 소년 소녀 120 명이 본당신부 대전에서 문답과 교리의 시험을 보아 그 중 우등자 10명이 운집한 교우들의 박수 갈 채중 상품을 탔다는데,당 지방교우들은 이런 시험제도에크게 찬성하여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 한다.
한편 본당 설립 4년 전에 발족하였던 청년회와 부인회의 활동도 배가되었다. 청년회의 정식명칭은 '언양지방 천주공교 청년회'로서 장례사업과 물산장려운동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각 공소회장이 청년회의 간사가 되어 자기 공소내에서 교인과 외교인을 막론하고 상(喪)을 당하면 즉시 다른 공소로 통보하여 전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교회 예규대로 장례예식을 치뤄 주었다. 당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서 스스로 각자의 식사를 휴대하고 장례예에 참석하였으며,특별한 이유없이 불참한회원에게는 벌금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또한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해서 우리 토산물을 애용하게 하여 일제의 수탈과 착취에 대항하였다. 아래의 기록을 통해 창립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전교 활동은 어려워만 갔는데 그것은 1937년 7월 중일 전쟁의 발발과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인하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제의 조선에 대한 강압과 수탈이 더해지고 이와 더불어 교회도 더욱 일제의 간섭을 받은 때문이었다. 게다가 연이은 흉작과 가뭄으로 인하여 교우들의 생활이 더욱 곤란해지고 그 결과 교우들이 생활고로 인해 종교를 등한시한 원인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에 타격을 준 것은1942년에 있은 외국인 선교사들의연금이었으며, 그로 인하여 조선의 모든 지역에서 전교 활동의위축을 초래하게 되었다.
2) 해방과 교회재건의 의지
태평양전쟁의 발발 후 평양 교구의 미국인 신부 35명은 즉시 체포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일제통치가 막바지에 이른 1945년 3월 31일에는 대구교구의 프랑스 신부들도 모두 체포되어 대구의 남산본당에 연금 당하였다. 그로 인하여 전교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당시 부산진본당의 서정길(요한) 신부, 청학동본당의 신순균(바오로) 신부, 밀양본당의 김준필(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리고 언양본당의 유흥모(안드레아) 신부는 조인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제 말기의 상황 속에서 강압과 착취가 행하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본당의 성직자와 신자들은 본당을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하였으며 꾸준히 본당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곧 조선의 광복과 함께 찾아온 종교의 완전한 자유였다. 언양본당은 제5대 주임인 유흥모 신부(1943. 2. 26.~1947. 5. 22.)가 재임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는데, 유흥모 신부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읽고 본당의 행사였던 순교자 기념식과 유치원 개원식을 겸해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하식을거행하였다. 한편 유 신부는 인근의 미사일 기지에서 전기를 끌어와 본당에 전기시설을 설치하였으나 일을 마무리 짓기 전에 전임되었다. 이어 부임한 제6대 주임 이성만(이냐시오) 신부(1948. 8. 1.~1952. 9. 25.)는 유흥모 신부가 설치하려던 전기시설을 완료하는 등 본당 발전에 노력하였다. 특히 1948년 1월 6일부터 3일간 청년회 피정신공을 행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사상의 혼란 속에서 매우 필요한 일이었으며 그 성과도 매우 훌륭하였다. 청년회 피정신공에 대하여 아래의 기록에서 잘 알 수 있다.
언양지방 청년회 피정
언양지방 하선필(下善弼)공소에서는 인근 공소 청년까지 6-여 명을 소집하여 거(지난) 1월6일부터 3일간 피정신공을 행하였다는 바 특히 본당 이냐시오 이 신부의 '예수 성심과 하자 없으신 성모 성심'게 대한 뜨거운 강론과 경주읍 안 신부의 "우리는 치명복자의 후손들이다. 치명자의 피를 받은 우리들의 사명은 크다!"라는 열열한 강론은 청중의 가슴 녹여 제1착으로 모두 극빈자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에 가입하고, 제2착으로는신학생 1인의 학비를 부담하리라한다. 특히 현금같은 사상계의 혼난기에 청년들의 피정은 유익하기보다도 필요한 것으로서 각지에서도 이런 표양을 따라야 할 것이다.
3) 6.25 전쟁의 발발과 본당의 양적 팽창
일제 치하의 시련기를 거쳐 해방과 더불어 종교의 완전한 자유를 누렸던 한국교회는 또 다시 시련의 시기를 맞이하는데 그것이 바로 6.25 전쟁이었다. 1950년 전쟁의 발발로 한국 정부는 수원,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수도를 옮겨야만 하였다. 또한 50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최후의 거점이었던 부산에 몰려들게 되었고, 이러한 와중에서 한국교회 전체의 성직자, 수도자 및 신자 그리고 각종 단체 등 대부분이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지역의 교회는피난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담당하였다. 부산지역에서 새로 본당이 창설되고 또 본당 설립을 위한 태동이 여러 곳에서 일어날 즈음에 기성 본당인 부산 시내의 3개 본당과 언양, 밀양본당 등 5개의 본당들은 전란으로 인한 피해를 적게 받았으며 밀려드는 신자들로 항상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본당의 주임 신부들은 피난 교회를 돌보면서 한편으로는 꾸준히 본당의 성장을 시도하였다. 본당에서는 제7대 주임 신부인 최병선(요한) 신부(1952. 9. 25.~1953. 12. 12.)가 재임하던 중 청년회, 성모회가 새로 조직되었으며, 인보공소가 설립되었다. 청년회는 본당뿐 아니라마을의 장례사업을 주관하여 외교인의 권면에 힘쓰고, 신자들이 사망하면서 성당에 기증한 '영정답'을 관리하여 그 수익금으로 본당재정을 도왔다. 지금까지고 본당에서는 영정답을 기증한 신자들을 위하여 해마다 영정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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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본당의 중흥기 (1954~1972)
-교세 확장 시대 (8대~13대)
1) 울산본당의 설립(1956. 4.26.)과 부산교구의 설립(1957. 1. 21.) .25 전란으로 인하여 부산지역이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 구실을 하게 되고 모든 활동의 중심 무대가 되자 부산지역 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예서는 새로운 본당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점점 높아졌고, 1954년에 들어서는 부산교구 설립을 위한 문제가 궤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51년,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가울산에 본당을 설립할 계획으로 본당의 이성만 신부와 상의하여 복산동에 대지를 매입하였다. 또한 순정공소 건물 25평을 이송하여 공소로 사용토록 하고 울산에 진주한 유엔군의 한국인 종군 신부인 윤병희(바오로) 신부가 그곳에 머물면서 본당일을 돌보았다. 그리고 1952년에는 울산성당의 현 강당 및 사제관의 대지를 매입하였다. 한편 제8대 주임인 김재석(요셉) 신부(1953. 12. 12~1955. 10. 20.)도 울산 진출을 적극 추진하여 1955년에 현 성모상 및 수녀원 부지도 매입하고 '송 요셉 유치원'도 개설하였다. 그리고 김 신부는 울산에 진주하고 있던미 공군의 한 현병상사의 많은 원조를 받아 성당(울산성당의 현 강당)을 3차에 걸쳐 완공하였다. 또한 이중배(토마스) 기성회장, 이 루시아 전교회장, 권해운 공소회장 등을 중심으로 본당 설립에 전 교우들이 노력하여 마침내 1956년 4월 26일 김재석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언양본당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한편 당시 최덕홍 주교는 대구교구의 관할 아래에 있던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을 독립시켜 부산교구를 신설함으로써 장차 이 지방의 가톨릭 발전을 더욱 촉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6월 18일, 이 지역을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고 서정길(요한)신부를 감목 대리로 임명하여 부산진 본당에 주재토록 하였다. 이에 경남 각 지역의 대표자들은 서정길 감목 대리가 부임하던 날 '경남교구 설치 기성회'를 창립하였다. 1955년 9월 1일 제2대 감목 대리로 임명된 정재석(요셉) 신부는 제3차 기성회 총회를 개최하여 주교좌성당 신축기금을 경남 각처의 본당을 순회하면서 거도적으로 모금하게 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부산에서 진행되던 중 드디어 1955년 12월 31일에는 주한 교황사절 퀸란(Quinlan, 具仁蘭) 주교에 의해 경남교구 설립 신청서가 교황청에 제출되어 접수되었고 1956년 4월 10일 교황청에서새 교구장 추천의 지시가 내려 왔다. 이에 따라 퀸란 주교는 서정길 주교와 협의하여 최재선(요한) 신부를 추천하였는데, 1957년 1월 21일자로 교황청의 주교성성을 통하여 교황의 부산교구 인가 지시가 내리게 되었다. 부산교구의 설립은 초기 신자들, 순교자들 그리고 그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진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한국 사회 전체가 정치의 부패와 전란으로 인한 피해로 말미암아 혼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서울 수복 후의 부산지역은 사회, 경제, 윤리의 문란이 어느 지역보다 심한 형편이었다. 이러한 사회상 속에서 부산교구가 설립된것은 사랑에 입각한 천주교회의 활동이 사회 속으로 보다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교세의 급격한 확장
휴전 후 본당은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1954년에 제8대 주임으로 김재석 신부를 맞이하면서 해방과 6.25 전쟁으로 일시 정체되었던 본당 분위기가 되살아나게 되었다. 김 신부는 유아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1954년 1월 '소화유치원'(현 안나유치원 전신)을 설립하였으며 신자들은 전교활동에 많은 힘을 쏟아 당시 신자수가 1,454명에 이르게 되었다. 김재석 신부의 후임으로 이 지방 출신의 김영제(요한) 신부(1956. 4. 11.~1962. 6. 17.)가 부임해 오면서본당의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김영제 신부 시절에는 신자수가 무려 1,467명에 예비자수가 2,000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란 후에 있은 구호물자의 영향이 적지않게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신앙적인 면보다 구호물자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수단으로 사용하여 생겨났고 그들을 일명'밀가루 신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편 김영제 신부는 1958년에 구포본당을 분리하고 11개 공소를 신설하였다. 당시의 교세통계를 연도별로 살펴보면 1957년에 1,438명의 신자와 1,220명의 예비자, 1958년에 1,685명의 신자와 1,200명의 예비자, 1959년에 1,854명의 신자와 980명의예비자, 1960년에는 1,996명의 신자와 200명의 예비자 숫자를 기록하였다.
3)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
김영제 신부가 부임해 오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 평신도들의 활동은 본당 중흥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1959년 1월1일에 박신득(베드로)을 초대 단장으로 19개 Pr.이 소속된 '무염시태 우리 어머니 꾸리아'(부산 바다의 별 꼬미시움 소속)가 설립되어 성모신심을 북돋았다. 당시의 활동이 아래의 기록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경남 울산군 언양본당에는 19개의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이 있어 행동단원 2백50명이 그들의 온 정성과 열성을 다하여 평신자 사도직에 종사하고 있는데, 재작년에 이어 이 본당을 단위로 한 '무염시태 위 어머니' 꾸리아가 설립되고 작년 부활절에 첫 번 '아치에스'(봉헌 사열식)를 거행하였는데 금년에도 부활주일인 4월 17일에 제2차 아치에스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 본당은 부산교구 부주교직을 겸임하고 계신 요안 김(金泳濟) 신부님이사목을 담당하고 계신데 이 노인신부님을 위해 레지오는 큰 보조자이며 훌륭한 일꾼들이다. 현재 이 '무염시태 우리 어머니' 꾸리아 산하 쁘레시디움은 미성년 쁘레시디움이 4개, 성인 쁘레시디움이 10개로서 단원은 행동단원 2백 53명, 협조단원 3백명이나 된다.
한편, 1927년 5월 25일에 조직되었으나 사실상 사라졌던 평의회가 다시 부활되어 먼저 각 공소의 재산과 신자수를 파악하여 새롭게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등 김영제 신부의 사목활동과 본당 사업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전교 활동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1959년 7월 27일부터 30일까지 교구 주최호 열렸던 부산교구 회장 묵상회에는 아래의 기록에 나타난 것과 같이 교구내 참석 본당 중에서 가장 많은 13명의 공소회장 및 레지오 단원이 참석하여회장과 레지오 단원의 상호 협조가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부산교구 회장 묵상회
-회장과 헤지오 마리애 단원의 상호협조 활발-
"부산교구 회장 연합 묵상회가 지난 7월 27일부터 30일까지 대양 중고등학교 강당에서 교구 주최로 열리었다."
강사는 강론에 하 요셉 신부, 교리강좌에는 김 안젤로 신부가 담당하였다. 이 묵상회에는 부산교구 소속 23개소의 본당에서 모여든 회장 180명이 참가하였으며 그중 가장 많이 참석한 본당이 언양본당의 13명이었다. 회장 묵상회는 금번이 최초로서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앞으로 연중행사가 되리라는 것이다. 회장들과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상호협조로 부산교구 설정 1년 후인 6월 말 현재 62,022명의 교우를 가지게 되어 교구 설정 당시보다 20,916명의증가를 보이고 있다.
김영제 신부의 뒤를 이어 부임한 제10대 이돈우(레오) 주임 신부(1962. 6. 22~1967. 1. 15.)는 이와 같은 평신도들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4개 공소(삼정, 유촌, 중리, 소호)의 건물을 축성하고 현재의 성모상을 건립하였으며, 신자들의 수적 팽창으로 인한 사목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수녀 영입을 추진하여 1965년에 '인보성체회'의 수녀 2명을 맞이 하였다. 그 후 1970년 가을에 '인보성체회'는 철수하고 1975년에 '예수성심 전교회'가 본당에진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제11대 신윤우(갈리스도) 신부(1967. 1. 15~1967. 9. 8.)는 약 8개월의 재임기간동안 전임 신부들의 사업을 이어 나가다 전임되었다.
4) 과도기
(1) 이농현상
일제 당시 한국 농촌의 농업 생산력은 일제하 이본의 식량 공급 기지로서 공출과 배급 제도에 의한 극도의 소비 억제 등 온갖 수탈을 당하는 악조건 하에서도 자체의 수효는 최소한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6.25의 전란으로 극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은 과잉 생산되는 농산물로 농업 공황이 일어나 농산물의 소비처를 장기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나온 것이 잉여 농산물 원조 법안인 'PL 4805호'였다. 이때전후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던우리나라는 잉여 농산물 원조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미국과의 이해 관계가 일치되어 1955년 5월에 '한미 잉여 농산물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결과적으로 전후의 구조 물자 단계를 거쳐 차츰 본격적인 수입 단계로 접어들어 한국 농업의 사양화를 재촉하게 되었다. 잉여 농산물은 국내의 농업 생산 기반을 현저히 약화시켰으며, 밀과 면화의 경우는 아예 논밭에서 그 자취마저 감추게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외국의 원조는 중단되었고 우리 산업은 농업 위주의 1차 산업에서 공업 위주의 2차 산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2차 산업의 단계로들어서면서 많은 공장의 건설이 이루어졌고 공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러한 2차 산업과 더불어 경제 발정의 계기로 작용하는 근로자의 저임금제가 이 지역에도 작용하였다. 즉, 근로자 저임금제의 파급 효과는 농촌의 농산물 가격에 심각하게 작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촌 젊은이들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언양지방에서도 이러한 이농현상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2) 신심단체 해체
젊은이들이 이농하는 아픔을 겪는 동안 본당은 또 다른 고통을 겪게 되었다. 본당 창설과 더불어 1927년 5월 25일에 설립된'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는 신부를 도와 본당 사목의 주도적 역할을 해왔는데, 제12대 배상섭(요한) 신부(1967. 9. 14.~1971. 1.)의 사목 방침에 따라 1969년 10월 26일 해체되고 자문회가 구성되었다. 또한 1959년 1월 1일 창설된 '무염시태 우리 어머니' 꾸리아가 1970년 해체되었다.
(3) 교세의 약화
한편 본당에서는 젊은이들의 도시에로의 이농현상을 막기 위해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재건 학교'를 운영하며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학교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배상섭 신부는 언양면 남부리에 성전건립을 계획하고 모금운동을 하였으며, 장학회를 조직하여 신자 자녀중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수여하였다. 그리고 '예술동호회'를 조직하여 외교인들과 부단한 접촉을 가지면서 이들에게 가톨릭 정신을 심어주기도하였다. 제13대 이동훈(안토니오)신부(1971. 11. 16~1972. 4. 12.)도 본당의 발전을 꾀하였으나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활동한 후 전임되었다. 이상과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의 이농현상과 신심단체의 해체 등은 본당의분위기를 침체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으며, 그 결과 한동안 계속적인 교세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1976년에 2,525명의 신자와 250명의 예비자가 있었으나, 1969년에는 1,957명의 신자와 32명의 예비자가, 1971년에 이르러서는 1,449명의 신자와 15명의 신자와 15명의 예비자로 줄었으며, 1973년에는 1,470명의 신자와 53명에 예비자로 잠시 증가하였으나다시 1975년에는 1,439명의 신자와 35명의 예비자로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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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본당의 근대기 (1973~1982)
-교회 쇄신(14대~18대)
1)본당의 재정비
제14대 주임 김성도(모이세) 신부(1972. 12. 7.~1975. 11. 26.)가 부임하면서 본당은 다시 재정비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먼저 환경미화를 위해 잔디와 나무를 심고 하수도 공사, 경지 정리 등을 통해 깨끗한 성당으로 만들었으며, 1947년 8월 25일 현대식 건물로 '안나 유치원'과 상가 아파트를 준공하여 아파트에서 나오는 월세로 본당 재정의 대부분을 부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1974년 7월 14일 주일학교 및 중고생 학생회를 창립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자질을 갖추게 하였다.또한 '인보성체회'에 이어 '예수성심전교회'에서 수녀가 파견되어, 주임신부의 사목활동의 협조자로서 본당의 재정비에 노력하였다.
2) '안나유치원'과 상가아파트의 건설
설립자의 세례명을 명칭으로 하고 있는 '안나 유치원'은 1946년 4월에 설립되었던 '소화유치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소화 유치원'은 이 지방에서 처음으로 유아 교육 사업을 실시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소화유치원'은 설립자이며 동정져인 정복순(안나) 선생이 직접 운영하며 다른 두 동정녀(김기순 데레사, 김복종 데레사)를 보조 교사로 하여, 일제 치하의 한글 말살 정책에 대하여 국어 교육의 시급함과 유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그러나 설립 2년 뒤인 1948년5월 정복순 선생이 숙환으로 사망하자 몇 년간 더 지속되다가 6.25 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그 후 제8대 주임인 김재석 신부가 유아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1954년 1월 '소화유치원'이 다시 개원되었다. 그리고 1961년에는 '4.19 탁아원'이라 개칭되어 5년간 존속하다가 다시 중단되었다. 1974년 제 14대 주임 김성도 신부는 언양 남부리에 있는 땅(570평)을 본당에 기증한 설립자 정복순 선생의 뜻을 받들어 유치원을 재정비하고 그땅과 여러 신자들의 사망시 기부한 영정답을 처분하여 상가아파트와 유치원 건물을 신축, 완공하였다. 안나 유치원과상가 아파트는 1974년 8월 25일 최재선 주교의 주례로 축성되었다.
3)신자 재교육
이 시기에 부산교구에서는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교리 지식이 갖추어질 때 사랑과 봉사를 통한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할 수 있다는 목표 아래 신자 재교육을 실시하였다. 우선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에서 발간한 「생활하는 신앙인」을 기본 교재로 하여 1974년부터 본당별로 연 2회의 재교육을 실시하도록 하고 아울러 본당 실정에 맞는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성직자 연례 피정, 본당 회장 및 사무장과 연수, 사목회 각 분과별 연구 발표회개최 등을 통한 재교육 활동도강화하였다. 이에 본당에서도 교구 방침에 발을 맞추어 제 15대 주임인 최영철(알로이시오) 신부(1975. 11. 26.~1979. 2. 16.) 때부터 신자 재교육을 공소, 마을별로 실시하였다. 신자 재교육은 신부, 수녀, 신자들을 강사로 하였는데 특히 사목위원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강의 내용은 공의회 정신에 바탕을 두었고 사목위원들은 1개월 이상 강의 준비를 하였으며, 사목위원들과 신부가 모여서 모의 강의도 하는 등 대단한 열성을 보였다.
4) 신심단체의 활성화와 '안나 데레사 회관'회관 건립
그리고 1959년 창설되어 1970년 4월 20일에 해산하게 된 '무염시태 우리 어머니' 꾸리아와 때를 같이해 1970년 8월 25일 레지오 12년만에 평화의 모후 Pr.의 마지막 주회로 해체된 19개의 Pr.은 1973년부터 본당의 재정비와 교회 쇄신이 이루어지면서 최영철 신부 때인 1977년 4월 24일 12개 Pr.이 소속된 꾸리아로 재 창설 되었다. 이로써 본당 신심단체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또한 1974년 7월 14일 주일학교가 설립된 것을 필두로 1976년 2월5일에는 언양 울뜨레아가, 1976년4월에는 삼성전관 주식회사 내의 종교활동 및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한 삼성전관 로사리오회가, 1976년 11월에는 송암회(현 청년회의 전신)가 발족되었고, 1977년 11월 1일에는 미사 때 사제를 보좌하는 복사단(국민학교 3년 이상)이 설립되었다. 한편 최영철 신부는 주일학교 학생들이 교리실이 없어서 사제관, 수녀원, 잔디밭 등에서 교리 수업을 하는 것을 보고 회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 회관은 제16대 주임 권지호(프란치스코) 신부(1979. 2. 16.~1980. 2. 11.) 재임시에 완공되어 각종 신심단체의 행사, 피정, 주일학교 교리실 등으로 사용하게 되어본당 신자들의 신심앙양에 큰 몫을 차지하였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회간은 세 분의 동정녀(정 안나, 김 데레사, 김 데레사)가 생정에 기증한 부지를 돈당에서 처분하여 기존의 낡은 강당을 헐고 1979년 11월 18일 그 자리에 건립된 것이다.
5) 젊어지는 교회
이 당시 농촌에서 도시에로의 이농현상으로 언양본당에는 장년층과 노인층 그리고 어린이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권지호 신부 재임 때부터 「교구 주뵤(부산교구 제357호)」와 「공동체 성가집」 사용 등으로 전례의 참여도가 높아지고, 구교우들과 신영세자들의 세대 교체, 젊은이들을 위한 피정 등을 통해서 젊은이들의 영성과 본당 활동에 대한 참여도가 증가되었다. 또한 이 지역에 새롭게 공장이 들어서면서 젊은층이 늘어나게되었다. 그리하여 제17대 주임김승주(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1980. 2.21.~1981. 2. 19)도 송암회, 로사리오회 등 직장 젊은이들을 위한 피정을 함으로써 본당 젊은이들의 활동이 왕성해졌다. 먼저 송암회, 청년 성가대, 삼성전관의 로사리오회 등에 소속된 젊은이들이 정기적으로 언양 시가지 정화 작업을 하였고 군부대(대암 부대)를 위문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또 1980년 6월 4일 대건회가 조직되어 그해 10월 19일에 온천 본당 장년회와 자매 결연을 맺음으로써 서로간의 친목 도모와 평신도 사도직 수행의 활성화를 가져 왔다. 또한 소년 꾸리아 설립(1980. 4. 20). 신자전화번호부 제작 배포(1980. 6. 8.), 성모회 재창단(1980. 12. 14) 등 본당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제18대 주임 하용달(안드레아) 신부(1981. 2. 19.~1983. 2. 17)도 젊은이들의 본당 활동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여, 젊은 직장인들을 포함해서 1년에 100명 이상의 신영세자가 생기게 되어 송암회, 삼성전관 로사리오회, 청년 성가대 등의 청년 신심단체는 농촌 일손 돕기와 미혼 남녀 신자 및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젊은이 잔치, 도서실 개설, 불우이웃돕기, 1일 찻집 그리고 본당 일 협조 등 활발한 황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81년 5월 24일본당 관할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고, 마당 포장 공사, 수녀원 도로 포장 공사 등 환경 정리를 하였다. 그리고 언양지역 비신자를 대상으로 그해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교양강좌를 개설하여 간접선교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이 교양강좌는 '삶의 의미', '인간과 법률', '현대인의 가정생활' 등을 주제로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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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본당의 현대기 (1983~1993 현재)
-교회의 성숙기(19대~20대)
1) 신심생활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접어들면서 언양본당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발전을 이루었다. 제19대 주임인 염봉덕(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1983. 2. 17.~1986. 2. 13.)는 특히 신자들의 영성생활과 신앙의 성숙을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신자들의 영성생활을 위한 피정, 연수 등을 개최하고, 중고생들에게는 선조들의 신앙의 터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생활을 점검할 수 있도록 성지순례를 실시하였다. 염 신부는 신자들의 신심생활과 더불어 신심생활에 도움이되는 정서생활에도 관심을기울여 글로리아 음악제, 바둑대회, 배구대회 등을 개최하여 신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제20대 주임인 김영곤(시몬) 신부(1986. 2. 13.~1991. 2. 18.)도 성체신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성시간(매월), 성체신심 피정 등을 통해 신자들에게 성체신심을 북돋았다. 또한 레지오 마리애를 정예화하여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리고 신자들의 종교에 대한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M.B.W. 교육, 신자 재교육 등을 실시하였다. 특히 1986년 8월부터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14박 15일동안 주일학교 초등부 3~6학년 학생중첫영성체 교리 교육대상자들에게 안나 데레사 회관에서 숙식을 시키며 집중적인 신앙교육을 받았다. 어린이들은 15일간 같이 숙식하면서 교리교육, 학교공부, 시청각교육 등을 받고 물놀이도 하면서 침구 정돈, 자기옷 빨기 등 생활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기도생활을 통해 훌륭한 신앙교육이 병행되어 이러한 신앙생활을 일상생활과 연결시킬 수 있게 되었다. 미래 교회를 위해 실시되고 있는 첫영성체 교리를 통해 성소개발은 물론 인간성 계발에도 한 몫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2) 성지로서의 언양
선조들의 피로써 성장해 온 언양은 골짜기마다 선조들의 발자위가 서려 있는 유서 깊은 곳치지만 몇몇 신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 그에 대해 뒷받침할 자료가 없었다. 그리하여 제20대 주임 김영곤 신부 때 '본당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더 잊혀지기 전에 묻혀진 역사의 재정립을 하고자 하였다. '본당사 편찬위원회'는 먼저 언양에 관계되는 증언을 채록하고 여러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였다. 또한 1986년 11월 9일 박해 당시 신자들의 피난처였던'죽림굴'을 발견하였다. 1988년10월 16일자의 「가톨릭신문」에는 죽림굴을 바력ㄴ한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한국판 '까타꼼바' 발견
-박해시애 숨어서 미사 성사 집전한 곳-
1백40여 년 전 박해시대 당시 초기 한국천주교 신자들이 관헌의 추적을 피해 신앙을 지키던 국내 유일의 천연석굴 공소이며 한국판 까타꼼바라 할 수 있는 '대재공소'가 경남 언양지방에 실존하고 있었음이 최근 밝혀져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부산교구 언양본당 주임 김영곤 신부가 1986년 11월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기도 그렸던 곳으로 보이는 석굴을 알고 있다."는 한 본당신자의 제보를 기초로 3차례에 걸쳐 경남 언양군 간월산일대를 탐사, 이 굴을 찾아내고주변의 지리를 고증한 끝에 이 굴이 최양업 신부가 1860년 9월 3일자로 작성한 사목서한에 나오는 죽림굴임을 밝혀낸 것을 최근 본사에 알려옴으로써 공개된 것이다. 굴 내부 길이 40여m, 폭 15~20m, 높이 3~4m로서 약 1백 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이 굴은 경남 울산군 상북면 이천리 간월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폭 4m가량 높이 1.5m의 좁은 입구로 출입하도록 되어있어 바깥에서는 눈에 잘 띄지않아 은신하기에는 천혜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김 신부는 이 굴이 최양업 신부가 사목했을 석굴공소로 단정할 근거로서 첫째, 최양업 신부가 사목서한제16신에서 밝힌 '간월공소'라는 지명과 제18신에서 밝힌 사목서한의 발신지인 '죽림'이라는 지명이 이곳과 일치하고 둘째, 박해 당시 간월산의 석굴에서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했다는 이 지방의 원로 신자들의 증언과 부합하는 유일한 석굴이며 세째, 발견 당시 신자들이 굴 안에서 곡식을 물에 불려 생식을 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구유와 방어용 죽창이 발견된 것을 꼽았다. 김 신부에 따르면, 굴주변이 산죽(山竹)이 많아 '죽림굴'이라고 불린 이곳은 언양지방의 최초의 공소인 '간월공소'(1815~1860)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대재공소'(1840~1868)의성전으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산 아래는 충청도 및 영남 각지에서 피난온 신자들이 토기와 목기를 만들고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지켰다는 것이다. 김 신부는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샤스땅 정 신부, 다블뤼 안 신부 등 선교사와 최양업 신부가 사목을 맡았으며 특히 최 신부는 경신박해(1859년 말~1860년 8월) 당시 여기서 4개월간 피신하면서 미사성제를 집전했다"고 말했다. 또 이 지방 첫 동정녀인 김 아가다가 자진체포와 방면을 거듭하면서도 최 신부를 도우다 임종하기도 했는데, 김 아가다의 행적은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서도언급되어 있다. 죽림굴을 성전으로 한 대재공소는 1868년까지 1868년까지 존속하다가 병인박해의 여파로 가혹한 박해가 몰아치자 1백여 명의 신자가 흩어짐으로써 28년만에 폐쇄되었는데, 이곳을 거친 순교자는 오치문, 김사집, 허인백, 김영제, 윤봉문 등이었다. 한편 언양본당 신자들은 1986년부터 매년 1회씩 죽림굴을 찾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있는데 지난 9월 28일에도 이곳에서 김영곤 신부의 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한편, 죽림굴의 사적안내판을 설치했다. 김영곤 신부는 "죽림굴은 박해를 피해 어렵게 신앙을 지킨 선조들의 믿음이 배어있는귀중한 성지"라고 말하고 "이곳을 많은 신자들이 참배 할 수 있도록 주변정관을 정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근의 간월공소-죽림굴-살티공소-언양성당을 잇는 순례코스는 영남지방의 핵심적인 순교 성지임과 동시에 수려한 경관을 갖추고 있어 청소년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최적지"라고 말한 김 신부는 "이를 위해서는 언양성당 내에 각종 유물을 전시함 기념관과 청소년들이 숙식하면서 순교 정신을 배울수 있는 회관의 건립이 시급한 과제이며, 이 사업에 대한 교회적인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강조했다.
또한 1988년에는 성지단장에 중점을 두어 성당 구내에 어지럽게 널려있던 전기선 및 전주를 없애고 지하 케이블을 구축하였으며 1989년 2월에는 성당 지붕 및 사제관의 지붕을 개수하였다. 그해 7월에는 본당 사택을 이전, 신축하였고, 10월에는 회관에 있던 사무실을 성당 입구로 이전, 신축하였다. 또한 1990년 1월에는 사제관을 신축하고 2월에는 성당 구내 대지를 확장, 정리하였다. 그리고 선조들의 신앙 유물이 집안의 구석구석에 버려져 있음을 안타깝게여겨 각 공소 등지에서 신자들이가지고 있던 성물, 민속품을 수집한 후 사제관을 개수하여 전시함으로써 '신앙유물전시관'을 1990년 12월 4일 개관하였다.
언양의 신앙유물전시관
4일 언양성당 옛 사제관이 신앙유물전시관으로 개관되었다. 동부 경남에 신앙유물전시관이 개관되었다는 것은 종파를 떠나 민속학적 면으로 실로 그 의의가 크며 앞으로 그 규모와 내용물이 더욱 알뜰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요즘같이 어지럽고 살벌한 세태 속에 선조들의 철썩같은 믿음, 사랑, 불굴의 의지, 선행등을 이 전시관을 통해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런 전시관이 곳곳에 더 많이 세워지기를 바란다. 또 날로 산업화니 도시화니하면서 옛 것이 툭하면 파괴되는안타까운 현실에서 조상의 숨결을 한 곳에 모아 보존하므로 뿌리의 맥을 이어가는 지혜는 후손들에게 값진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이 전시관의 내용물은 서적, 서류, 성물, 민속품, 사진 등으로 분류되어 모두 6백 95점이다. 서적 1백26점 중엔 가톨릭사를 연구하는 종교학자나 사학자, 민속연구가들에게 귀중한 자료도 있다고 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언양은 아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천주교 교회사에서 동부 영남권 신앙의 요람지요 성소의 온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에서 30여명의 신부와 30여명의 수도자가 배출되었다. 경주, 울산,동래, 밀양 사이에 위치한 언양은 태백산맥 남단을 마무리 하는듯 1천m 이상의 산이 즐비한 곳으로 우리네 선조들은 신앙을 지키려고 이곳에 숨어들었다. 1801년 신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신앙인들은 전답과 가산을 버리고 깊고 험한 산골에 숨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켜오다 20여명의 순교자와 신앙증거자를 내었고 13개처의 성지를 남겼다. 특히 간월공소와 대재공소(일명 죽림굴)는 이름나 있다. 이 죽림굴은 언양지역의 첫 공소인 간월(1815~1860)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1840~1868) 공소이다. 당시 언양 주변산 일대에는 충청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온 신자들이 움막을 짓고 살면서 토기와 목기를 만들고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였다. 죽림굴 속에 숨은 자 중에는 성인 김대건 신부와 같이 중국에서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가 있는데 그는 4개월간 숨어 있으면서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신자들은 연기가 나지 않도록 곡식을 구유에 넣어 물로 불려 먹었다고 하니 그 고초가 오죽했으랴. 그 한많은 구유가 오늘날 신앙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어 이를 보는 우리들은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배신과 증오가 죽솥의 죽 끓듯 하는 세상에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진리만을 지키려고 숨어 살다 순교한 신앙인들의 당시 생활상을 전시관의 유물로 상상해볼진대 우리는 그들의 굳은 의지에 머리가 수그러질 뿐이다. 옛 조상의 발자취에서 우리는 새 숨결을 찾아야 한다. 어지러운 방황의 이 세태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 곁에 신앙유물전시관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정신적 의안이 아닐 수 없다. 사자(死者)들의 숨결과 생자(生者)글의 숨결이 교차되는 이 유물전시관에서 우리는 사자들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를 귀기울여 보자. 조용히 묵상하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드리자. 언양성당의 신앙 물전시관이더욱 내실화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동아 전시관 설립을 위해 사라져 가는 유물을 일일이 수집한 신부들과 신자들 그리고 민속관계자들의 노고를 차하한다.
이렇듯 오랜 역사의 세월을 보내면서 본당은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하였으며, 순교자의 얼이 살아 숨쉬는 빛의 성지 언양의 중심이 되었다.
3) 본당의 과제와 미래의 모습
언양본당은 1970년 오한우(베드로), 김교희(프란치스코) 두 분의 첫 신자로부터 시작되어 약 2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는 신앙의 발전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순교 선조들의 피와 땀의 바탕 위에 이룩된 본당의 발전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당면한 과제는 미완성된 성당을 원래의 설계도대로 완성하고, 피정센터를 건립하는 일이다. 또 현재의 신앙유물전시관은 옛 사제관을 개축한 것이기에옛 사제관을 원래대로 복원하여보존하고 현재의 신앙유물전시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전시관 다운 형티로 신축하는 일고 시급하다. 한편 순교자들의 삶과 흔적을 되살리느 ㄴ작업도 병행되어야 하니, 먼저 초대교회 언양지방의 교회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일과 이것을 위해서 이 지역에 보관되어 있다가 현재는 타 지역의 개인이나 단체에 소장되어 있는 사료들을 모으는 작업이 하루 빨리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외적인 노력과 더불어 언양본당 신자들은 열심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선조들의 믿음을 본받아 계속적으로 언양지방이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서 남아있게 노력하여야할 것이다. 특히 선조 신앙인들의 얼이 살아 숨쉬는 13곳의 성지를 하루 빨리 개발하고 보존하여 그들의 믿음과 생활을 본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온 천지에 전하며 하느님 나라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야 하겠다. 본당 신자들의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는 한 언양은 언제나 성지로서 모든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들에게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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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2. 현존공소
3. 폐쇄공소
4. 타 본당이속 공소 |
@언양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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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 관
1) 개관
언양지방의 천주교 전래는 한국의 천주교 전래와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즉, 오한우와 김교희가 함께 서울에서 초기 천주교 신자들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옴으로써 언양지방에 천주교의 씨가 뿌려졌던 것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한우는 순교하고 김교희는 가정을 이끌고 간월산 불당골로 피신함으로써 언양지방의 첫 공소가 설립되었다. 한편 신유박해로 탑곡으로 유배된 강이문에 의해 탑곡에서도 작으나마 신자촌이 형성되었고 또한 강이문에 의해신자가 된 예씨 청년이 그의가족과 그가 권하여 신자가 된 5, 6세대와 함께 정착한 상선필(예씨네골)에도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언양에서는 간월산 불당골, 탑곡, 상선필 등 세 곳에서 신자촌이 형성되어 서로 연락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 을해박해로 충청도, 경상도 등의 지방에서 신자들이 피신을 와 이곳 세 개의 신자촌에 정착함으로써 이 신자촌들은 더욱 커졌고 확실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827년의 정해박해로 인하여 이 지방의 신자촌은 파괴되었고 김교희 가정은 경주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 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많은 신자들은 탑곡, 상선필을 거쳐 간월과 대재에 모여 들었다. 1840년경에는 충청도와 영남 각처에서 피신온 신자들이 움막집을 짓고 토기, 옹기, 숯을 구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해 대재 또한 간월과 같은 큰 규모의 신자촌이 되었다. 또한 최양업 신부의 전교 활동으로 내와, 하선필 등지에서 새로운 신자촌이 형성되어 언양지방의 신자들은 활발한 전교 활동과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당시 남주견의 가족도 입교하여 양산의 범실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860년의 경신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고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간월공소는불태워져 버리고 대재 역시 공소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1866년 이후 거듭된 박해로 간월과 대재는 1868년에 완전히 해체되었다. 간월과 대재가 해체되자 이곳의 신자들은 더 깊은 산골인 안살티로모여 들어 살게 되었고 다른 곳에 피신했던 신자들도 박해가 심해지자 이곳으로 모여 새로운 신자촌을 형성하였다. 그후 이들은 사기점으로 장소를 옮겼다가 다시 박해가 끝날 무렵 현재의 살티공소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전국적인 박해가 점점 수그러들고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보장되기 시작하자 산 속에 숨어 지내던신자들이 마을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곳곳에 신자촌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설립된 지역으로는 송대, 언양, 가천, 살티와 경주지방의 진목정, 와항, 그리고 후예 울산으로 이속된 아실, 초정, 양산의 내포, 대석, 호계 등이 있다. 한편 각 신자들의 왕성한 전교활동으로 언양본당 설립 전까지는 미호, 순정, 양산, 범곡, 구영, 금산, 양산, 증산, 굴화 등의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대석공소는 1917년에 준본당으로 승격되어 양산지방의 천주교회로 간주되었다. 그 뒤 경주본당과 언양본당이 연이어 설립되어 와항, 진목정, 범곡 등은 경주본당으로이속되었으며, 송대, 언양 두 공소는 언양본당으로 승격되고 나머지의 공소는 모두 언양본당의 관할 아래 두어졌다. 언양본당이 설립되면서 더욱 활발한 전교활동으로 인해 언양지방에는 전읍(1930), 삼정(1948), 직동(1950), 인보(1954),봉계(1955), 소호(1956) 등의 공소가 계속하여 설립되었으며 언양본당과 먼 거리에 있던 신자들의 신심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 언양본다의 걸립 초부터 추진되어 온 울산 지역의 본당 창설이 결실을 이루어 마침내 1956년에 울산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울산지역의 아실, 초정, 양정, 신암, 구영, 굴화, 화산등의 공소가 울산 본당의 관할 아래 들어갔다. 이렇게 언양본당은 울산본당의 분할로 인해 공소 관리가 활발해졌으며 그로 인해 궁근정(1957), 사촌(1957), 두동(1957), 길천(1958. 1913년에 설립된 순정공소가 길천공소와 병합), 반곡(1958), 중리(1958), 다개(1964) 등의 여러 공소가 계속하여 설립되었다. 한편 양산지역의 내포, 대석, 범실,호계, 금산, 양산, 증산 등의 공소는 1956년 이후 삼랑진, 김해, 구포, 동래 등의 본당 소속으로 되다가 마침내 1967년에는 양산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가속화된 동시화와 이농현상에의한 교세의 약화로 인해 반곡(1960), 중리(1963), 가천(1965) 등의 공소가 폐쇄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애ㅔ 들어와서도 계속되어 언양지방의 초기 공소인 탑걱이 1983년에, 다개공소가 1985년에 폐쇄되었다. 현재 언양본당에 소속된 공소는 초기 공소인 상선필을 비롯하여 이후 계속하여 설립된 내와, 하선필, 살티, 미호, 전읍, 삼정, 직동, 인보, 봉계, 소호, 궁근정, 사촌, 두동, 길천 등 15개 공소와 1988년에 설립된 배내공소를 합하여 총 16개의 공소가 현존하고 있다.
편집자 주) 2005년 1월 현재 8개 공소 현존 - 살티, 궁근정, 순정, 길천, 직동, 인보. 하선필, 상선필 공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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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현존공소
(아래 내용은 1993년 현재 자료입니다)
푸른색의 공소 8개소 : 2005년 현존 공소입니다
1) 상선필공소 (1850.5. ~ 현재)
(1) 연혁
공소 설립 이전은 탑곡공소 소속으로 경북 외남면과 경계를 이루며 고헌산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신자온. 이만채의 「벽위편」에 의하면 "1801년 주문모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강이문(교명미상)이 언양으로 귀양감"이라고 나오는데 그 귀양지가 탑곡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그는 열심하고 능력있는 신입 신자였습니다. 그의 의젓하고 규칙적인 행동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에게로 쏠렸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그의 돌봄으로 개종한 집안이 한집밖에 늘지 못했습니다." 라고 적혀있는데 강이문이 영세시킨 사람이 예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그래서 이곳을 한 때는 예씨네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상선필 공소는 병인박해 등을 피해 신자들이 이곳으로 피신해 오면서 공소가 형성되었고, 교우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그래서 이곳은 공소 설립 초기부터 많은 전교 신부들이 거쳐 갔다. 특별한 인물로는 1839(기해)년 샤스땅 정 신부가 1차와 2차로 전교를 하였고, 그후 1845~1849년 다블뤼 안주교가 이곳 상선필에 들러 성사를 주었다. 1850년경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지방으로 전교를시작하면서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실질적인 공소가 되었다. 처음의 공소 건물은 뒤테르트르(Dutertre) 신부가 거처하던 집으로, 커다란 안채가 셋이요, 넓은 뜰과 대나무 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893년도 당시 상선필 공소의 회장은 한 벨라도였으며 이 공소를 방문한 성직자는 다블위 안 주교, 리델 신부, 최양업 신부 등이며, 박해 후에는 로베르(한국명 김보록) 신부, 죠조 신부 등의 방문을 받았다. 두 번째 공소건물은 1917년 상선필 공소 신자들의 노력 봉사로 지은 것인데, 당시의 금액으로 60원으로 건립하였다. 그러나 공소는 6.25때 신자집 3가구와함께 전소되었으며, 현재의 공소는 그후에 재건되었다. 초기 선조 신앙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상선필 공소도 도시화의 물결 속에 휩쓸려 많은 교우들이 새 삶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 버리고 지금은 6세대 31명의 신자들이 옛날에 번창하였던 상선필 공소의 명맥만 유지, 깊은 산 대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고 있다.
(2) 역대 공소회장
초 대 : 최 종 수 (본명미상) 재임기간 미상
2 대 : 박 영 숙 (시 몬) 재임기간 미상
3 대 : 김 성 대 (본명미상) 재임기간 미상
4 대 : 방 주 원 (본명미상) 재임기간 미상
5 대 : 김 복 수 (바 오 로) 재임기간 미상
6 대 : 최 해 용 (요 셉) 재임기간 미상
7 대 : 최 인 표 (도 마) 재임기간 미상
8 대 : 이 종 술 (바 오 로) 재임기간 미상
9 대 : 황 이 웅 (마 태 오) 재임기간 미상
10 대 : 최 경 도 (벨 라 도) 현 재
(3) 현황
현소재 : 두서면 상선필 1049
현회장 : 최 경 도 (벨라도)
세대수 : 6 세대
신자수 : 31명 (남 17명/여 14명)
2) 내와공소 (1850~현재, 주보성인 : 비오)
(1) 연혁
공소 설립 이전은 탁곡공소 소속으로 박해 때 탑곡공소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내와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공소가 형성되었다. 불편한 교통과 이농현상으로 신자가 감소하여 5세대 17명이 공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 역대 공소 회장
초 대 : 박 시 언 (비 오) 재임기간 미상
2 대 : 박 인 익 (비 오) 재임기간 미상
3 대 : 이 학 도 (본명 미상) 재임기간 미상
4 대 : 김 만 수 (본명 미상) 재임기간 미상
5 대 : 권 경 조 (프란치스코) 재임기간 미상
6 대 : 박 언 열 (계 명) 재임기간 미상
7 대 : 박 재 환 (멜 키 올) 재임기간 미상
8 대 : 이 재 호 (베 드 로) 1982 ~ 현 재
(3) 현황
현소재 : 두서면 내와리 293
현회장 : 이 재 호(베드로)
세대수 : 5세대
신자수 : 17명(남 7명/여 10명)
3)하선필공소(1852.5.~ 현재)
(1) 연혁
공소 설립 이전은 상선필공소 소속이었으며 원래 경주 외남면 지역으로 조선 고종 광무 10년(1906)에 울산군 두서면에 편입되었다. 하선필공소의 설립 경위는 지리적 위치로 보아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전교시절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893년 뮈텔 주교 일행이 상선필공소 방문중 하선필에 살던 최 시몬 (당시 78세)의 집에 방문하면서 그의 집이 공소로 사용되었다. 병인박해 후 한 베드로 집안과 박영숙(시몬) 집안,김문옥 신부의 부친 등이 주동이되어 선필공소를 세웠다. 그리고 1876년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여 이곳에 판공성사를 주었다. 당시 공소의 신자수는 82명이었으며, 고백성사 58명, 영성체가 44명이나 되었다. 그후 김문익 공소회장을 비롯한 초기 역대 공소회장들의 노력으로 뮈텔 주교를 비롯, 드망즈 안 주교 등 많은 성직자들이 거쳐 갔으며 한때는 뒤테르트르 신부가 3개월간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초기 공소의 주요 교우로는 최 시몬, 이 루이스 등이 있으며, 현재 공소는 1923년에 경당으로 건축, 성 베르나르도 성인을 주보로 모시고 드망즈 안 주교가축성하여 성체를 모시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쳐 차츰 축소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간월, 대재, 살티를 비롯 초기 선조 신앙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하선필공소도 다른 공소와 다름없이 많은 신자들이 도시화의 물결 속에 하나, 둘씩 고향을 떠나 새로운 하선필공소도 다른 공소와 다름없이 많은 신자들이 도시화의 물결 속에 하나, 둘씩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향해 나가고 현재는 14세대 60여명이 공소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2) 역대 공소회장
초대 : 최세형( 시 몬 ) 재임기간 미상
2 대 : 한문필( 베 드 로 ) 재임기간 미상
3 대 : 김문익( 안드레아 ) 재임기간 미상
4 대 : 이재길( 마르띠노 ) 재임기간 미상
5 대 : 이말출( 바 오 로 ) 재임기간 미상
6 대 : 이정원( 다 두 ) 재임기간 미상
7 대 : 최주해(바스티아노) 재임기간 미상
8 대 : 이원규( 벨 라 도 ) 재임기간 미상
9 대 : 최주해(바스티아노) 1990.3.1 임명
10대 : 이종술( 벨 라 도 ) 1991. 현재
(3)현황
현소재 : 두서면 하선필 680
현회장 : 이원규(벨라도)
세대수 : 14세대
신자수 : 60명 (남 27명/여 33명)
4) 살티공소(1868.5.~현재, 주보성인;성가정)
(1) 연혁
살티는 경북 청도, 경남 밀양, 울산의 경계 지역에 있으며, 또한 가지산(1,239m) 밑에 자리잡고 있는 신자촌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피난처이기도 했으며 옛날부터 전쟁을 위한 화살을 만들었던 곳이라 해서 '살틔 또는 살터'라고 하며, 호랑이 등 맹수들이 많아서 감히 사람들이 살지 못했다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간월과 언양지방에 살던 신자들이 깊은 산골인 안살티로 피난을 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신자들이 피난을해서 살 수 있는 곳이라 해서'살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살티공소는 부근의 간월, 대재, 선필공소 등과 함께 영남지방 초기 신자들이 시낭ㅇ의 요람지였다. 병인박해 때 포졸들이 간월, 대재, 선필 등의 신자촌을 덮치자 신자들은 모두 경북자인의 큰골, 청도의 구룡 등지로 흩어져 피난을 갔으며 차츰 박해가 잠잠해지자 이곳 안살티로 찾아 들어와서 신자촌을 형성하였다. 살티공소는 병인박해 때 고문의 후유증으로 장하치명한 순교자 김영제(베드로)의 유해가 안장된 곳으로 지금도 영남지방을 비롯 타지방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순교자의 삶을 묵상 참배하고있다. 또한 순교자의 후손들도 대를 이어 이곳에서 순교자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여기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살티는 1893년경만 하더라도 농사를 짓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숯을 굽고 살았다. 당시 최재선 주교의 조부인 최일문(베드로)와 김문옥 신부의 부친 등도 이곳에서 살았는데, 김문옥 신부의 부친은 이곳에서 호랑이에게 호식을 당했다고 하며 현재 그 무덤은 살티에 있는데, 일명 '범찌꺼기 묘'로 전하고 있다. 이곳의 신앙 공동체는 처음 병인박해 때 안살티에 있었으나 그후 부근의 사기점으로 옮겼으며, 다시 박해가끝날 무렵에 현재의 살티공소로 옮겨왔었다. 현재의 공소건물은 1982년 교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농촌을 버리고 이사를 갔지만 순교자의 후손을 비롯하여 대대로 내려오는 신자16세대 60여명이 이곳 살티를 지키고 있다. 특별히 이곳은 성소의 온상지로 많은 성직자, 수도자를 배출하였다.
(2) 역대 공소회장
초대 : 김영제 ( 베 드 로 ) 재임기간 미상
2 대 : 남의선 ( 안드레아 ) 재임기간 미상
3 대 : 남재학 ( 마 태 오 ) 재임기간 미상
4 대 : 김광식 ( 아오스딩 ) 재임기간 미상
5 대 : 곽찬용 ( 마 리 노 ) 재임기간 미상
6 대 : 이인갑 ( 막 시 모 ) 재임기간 미상
7 대 : 김원근 (프란치스코) 재임기간 미상
8 대 : 김명관 (베르나르도) 현재
(3) 현황
현소재 : 상북면 덕현리 1115
현회장 : 김명관(베르나르도)
세대수 : 16세대
신자수 : 68명 (남 31명/여 37명)
5) 미호 공소 (1902~ 현재)
(1) 연혁
미호공소는 1902년 부산본당 5대 신부인 요한 롤트 노 신부 시절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이곳은 지금은 고인이 된, 대구대교구 교구장을 역임한 서정길(요한) 대주교의 고향이기고 하다. 한때 번창했던 이곳 공소도 이제 3세대 4명의 신자가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신앙을 지켜가고 있다. (2) 역대 공소회장
초대 : ? 현재 : 노연이 (요안나) 현재
(3) 현황
현소재 : 두서면 미호리 506
현회장 : 노연이 (요안나)
세대수 : 3세대
신자수 : 4명(남 0명/여 4명)
6)전읍공소
(1) 연혁
전읍공소는 본당 설립 3년 후인 1930년에 초대 본당신부였던 보드뱅 정 신부에 의해 설립하였으며 그후 교세의 확장으로 1962년 7월에 이돈우(레오) 신부를 모시고 공소 건물을 축성하였다. 번창하던 전읍공소도 신자수가 감소됨으로 인해 공소건물은 폐쇄되고 현재 2세대가 살고 있다.
(2) 역대 공소회장
초대 : 이경춘 ( 도 마 ) 재임기간 미상
2 대 : 이종철 ( 필 립 보 ) 현재
(3) 현황
현소재 : 두서면 전읍리 70
현회장 : 이종철(필립보)
세대수 : 2세대
신자수 : 13명(남 5명/여 8명)
7)삼정공소(1948 ~ 현재)
(1) 연혁
삼정공소는 1948년 이성만(이냐시오) 신부 재임시절 교세 확장으로 공소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공소건물은 교세의 약화로 인해 1987년 3월에 폐쇄되었으며 현재 5세대가 살고 있다.
(2) 역대 공소회장
초대 : 최 영 극 ( 도 마 ) 재임기간 미상
(3) 현황
현소재 : 두동면 하삼정리 612
현회장 : 황무식 (가시미로)
세대수 : 5세대
신자수 : 26명(남 11명/여 15명)
8) 직동공소 (1950.3.10.~ 현재)
(1) 연혁
공소 설립 이전은 송대 소속으로 언양 첫 신자인 김교희(프란치스꼬)가 살던 곳이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직동(와곡)에서 간월 불당골로 피신하였으며, 1834년 사망할 때까지 신앙을 지켜오면서 언양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어 1839년 기해박해시 충청도, 강원도, 경북 일부지방(청송, 안동, 진보 등)의 신자들이 언양으로 피난오면서 이곳 직동도 교우촌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직동공소는 1950년 3월 10일 '마리아 우리어머니'Pr.이 설립되면서 직동에서송대까지 다니기가 불편하여 공소 설립을 착안하였다. 이에 최 아가다씨가 땅을 기증하고, 김영제 신부가 목재를 기증하여 공소를 건립하였으며 그후 1967년 낡은 기존 공소를 뜯고 현재의 공소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공소 교우들은 이공소를 짓기 위해 절미운동과 부역 등으로 이룩하였다. 현재 직동공소는 신자수가 111명으로 본당 관할 내 큰 규모를 가진 공소중 하나이다.
(2) 역대공소회장
초대 : 이만종( 유 다 ) 1950. 3. 10. 임명
2 대 : 황정수( 시 메 온 ) 1957. 임명
3 대 : 방우식( 도 밍 고 ) 1961. 임명
4 대 : 이인호( 에밀리오 ) 1963. 임명
5 대 : 방우일(프란치스코) 1964. 임명
6 대 : 정원모(프란치스코) 1991. 현재
(3) 현황
현소재 : 언양면 직동리 1131-1
현회장 : 정원모(프란치스코)
세대수 : 25세대
신자수 : 111명(남 56명/여 55명)
9) 인보공소
(1) 연혁
공소 설립 이전은 하선필공소 소속이었으며 최석만(마르꼬), 최 요셉 형제들이 주축을 이루어 자기 개인집을 공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의 공소건물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김재석 신부의 주례로 1954년 1월 19일에 축성되었고, 그후 이곳에서 중리, 하삼정, 전읍공소 등이 분리되어 나갔다. 인보공소는 두동, 두서 지역의 중심지이며, 본당에서는 이곳을 준본당화의 일환으로 1986년 공소 옆에 있던 교회건물을 매입하고교세확장을 모색하고 있다.
(2) 역대 공소회장
(3) 현황
현소재 : 두서면 서하리 351
현회장 : 이상준(노렌조)
세대수 : 26세대
신자수 : 104명(남 47명/여 57명)
10) 봉계공소
(1) 연혁
봉계공소는 김재석(요셉) 신부 (1953. 12. 12.~1955. 10. 20.) 재임시 설립되었다. 현재는 공소회장 신정태(베드로)씨 사가에서 공소를 치르고 있으며 5세대 20명의 신자로 구성되어 있다.
(2) 역대 공소회장
초대 : 신정태( 베 드 로 )
(3) 현황
현소재 : 두동면 봉계리 537
현회장 : 신정태(베드로)
세대수 : 5세대
신자수 : 20명(남 8명/여 12명)
11) 소호공소(1956 ~ 현재)
(1) 연혁
공소 설립 이전은 와항공소 소속으로 경주 산내면과 경계를 두고 있으며 태백산맥 줄기인 고헌산(1,033m)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공소이다. 1956년 이 공소의 첫 신자 장용희(미카엘)를 중심으로 10세대 40여명의 신자로 공소 문을 열었다. 처음 공소는 개인집을 구입, 방을 한 칸 더 확장하여 사용하였으나 1978년에 건물을 헐어 버렸고 그 장소는 현재 밭(20평)으로 사용되고 있고, 공소는 손성대(프란치스코)댁에서 치르고 있다. 소호공소의전성기는 60년대 초반으로 당시신자수는 110여명에 이르렀으며 공소회장 최석만씨의 활동으로 신자들 상호간에 유대관계가 두터웠다. 그후 산에서 생활하던(산판) 신자들이 빠져나가자 신자수는 감소하기 시작하였고, 산업화의 물결에 많은 젊은이들이 휩쓸려 농촌을 떠마버렸다. 현재 소호공소는 8세대 20여명의 신자들이 고헌산 깊은 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2) 역대 공소회장
초대 : 장용희( 미 카 엘 ) 1956 임명
2 대 : 최석만( 마 르 코 ) 1960 임명
3 대 : 손성대(프란치스코) ? 현재
(3) 현황
현소재 : 상북면 소호리 772
현회장 : 손성대(프란치스코)
세대수 : 8세대
신자수 : 22명(남 12명/여 10명)
12) 궁근정공소(1957. 3. 17. ~ 현재)
(1) 연혁
공소 설립 이전은 길천(순정)공소 소속이었으며 제 9대 김영제(요한) 신부 (1956. 4. 11. 부임) 시절 길천공소에 살던 박성묵(가스발) 초대회장의 부친인 박정탁(朴廷卓)씨 가정이 궁근정으로 이사 오고 마을 사람들이 입교하면서 공소가 필요하게 되엇다. 공소 신축은 본당 보조없이 공소 회장이 물심 양면으로 협조하고, 석남사 산판일의 이득과 신자들의 노력봉사로 이루어졌는데 문 야고보는 목수로서 건축 공사에 봉사하였다. 공소 건물은김영제 신부의 주례로 1957년 3월19일(화)에 축성되었고, 김 신부 때 창단 된 이 지역의 '지혜로우신 우리 어머니' Pr.은 제12대 배상섭 신부(1971. 1. 이임)가 떠나기 직전까지 운영되었다.
(2) 역대 공소회장
초대 : 박성묵( 가 스 발 ) 1957. 3. 17. ~ 1984. 10. 3.
2 대 : 최상학( 요 한 ) 1984. 10. 4. ~ 현재
(3) 현황
현소재 : 상북면 궁근정리 775
현회장 : 최상학(요한)
세대수 : 8세대
신자수 : 33명(남 14명/여 19명)
13) 사촌공소
(1) 연혁
신설 공소로서 1957년 4월 6일 본당내 공소 설립에 역점을 두고 사목을 하신 김영제(요한)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전교회장 최(이름 미상) 회장 집을 공소로 사용하다 차츰 신자가 늘어감에 따라 마을 동사무소를 공소로 구입하여 사용하게 되었다(구호물자 영향). 그때 당시 공소신자 수는 100여명에 이르렀으며 그후 1975년에 공소를 다시 마을 주민에게 매각하고 선형식 회장 댁에서 공소를 치르고 있다. 현재 사촌공소는 3세대11명의 신자로 공소의 이름만 간직하고있다. (2)역대 공소회장
초대 : ?
2 대 : 선형식(라우렌시오)
(3)현황
현소재 : 삼동면 사촌리 845
현회장 : 선형식(라우렌시오)
세대수 : 3세대
신자수 : 11명(남 6명/여 5명)
14) 길천(순정)공소 (순정 : 1913. 12. 16.~ 현재, 길천 : 1958. 8. 25.~ 현재)
(1) 연혁
순정공소는 1860년경 신자촌이 형성되었으며, 공소 첫 신자인 김규흡의 아들 김 베드로는 한약방을 운영하여 한약 재료 구입차 대구 약령시에 갔다가 포졸에게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박해를 피해 모인 신자가 많아지면서 1913년 12월 16일(화) 공소건물을 지어 드망즈 안 주교를 모시고 공소건물을 축성하였다. 이후 드망즈 안 주교는 1917년 12월 13일 페셀 신부와 순정공소를 방문 찰고를 하였다. 순정공소는 1967년1월 9일 부산공교협회 제2회회의 및 공소회장 피정을 열었으며, 또 1918년 8월 15일 부산지방 천주공교협회 임시총회를 개최해 230명이 참석하였고, 1921년 2월 11일 부산지방 공소회장 피정이 열려 41명이 참석하였다. 순정공소는 많은 성직자들이 순방하였고, 또 휴양지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1951년 대구 교구장 최덕홍 주교가 울산에 본당을 설립할 계획으로 공소건물 25평을 뜯어 복산동(현 울산성당)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많은 성직자들의 순방과 중요한 행사 등이 열렸던 순정공소는 1927년 송대에 본당이 생기면서 차츰 공소의 모습으로 변해갔고, 또한 1958년 8월25일 길천(후리)에 또다른 공소를 설립, 분가하여 현재 길천리 내에 2개의 공소가 있다. 길천공소가 생긴 그 이듬해 1959년도 당시에 200여명에 이르는 공소신자가 있어 공소의 중흥기를 이루었다. 이후 이농현상으로 많은 이들이 농촌을 등지고 살다가 최근 공단이 들어서는 등의 요인으로 인해 유입 신자가 조금 있고 기존 공소 신자와 병합, 공소의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한편 길천공소는 공소 설립 이전은 순정공소 소속이었다. 길천공소는 1958년 8월 25일 김영제(요한) 신부 시절 순정공소에서 분할 신설되었는데, 그것은 구호물자로 인한 신자의급격한 증가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호물자 중단과 함께 기존의 신자들의 냉담이 늘었으며 또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 이농화 현상으로 신자들이 동시로 떠나면서 한때 가장 큰 공소로서 위엄을 자랑하던 길천, 순정공소는 독립된 공소건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합쳐 운영되고 있다. 현재 교통편이 편리하고 본당과의 거리가 6km 정도밖에 되지않아 길천공소는 공소로서의 기능은 약화되고 단지 공소, 신심단체의 회합장소로 이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길천공소와 순정공소는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2) 길천공소 역대 공소회장
초대 : 김진수( 야 고 보 ) 1958. 8. 25. 임명
2 대 : 김용호( 바 오 로 ) 1967. 3. 20. 임명
3 대 : 김두홍(토마스아퀴나스) 1986. 2. 2. 임명
4 대 : 김두원( 도 마 ) 1991. 3. 1. 현재
(3) 길천공소 현황
현소재 : 상북면 길천리 후리
현회장 : 김두원(도마)
세대수 : 27세대
신자수 : 107명(남 58명/여 49명)
(4) 순정공소 역대 공소회장
초대 : 김병현
2 대 : 박정탁( 베 드 로 )
3대 : 최무상( 말 시 알 )
4 대 : 김진수( 야 고 보 ) 1958. 8. 25. 임명
5 대 : 김용호( 바 오 로 ) 1967. 3. 20. 임명
6 대 : 김두홍(토마스아퀴나스) 1986. 2. 2. 임명
7 대 : 김두원( 도 마 ) 1991. 3. 1. 현재 P 141 순정공소 사진 2장
(5) 순정공소 현황
현소재 : 상북면 길천리 순정 1092
현회장 : 김두원(도마)
세대수 : 26세대
신자수 : 121 명(남 61명/여 60명)
15) 두동공소(1957 ~ 현재)
(1) 연혁
공소 설립 이전 소속은 인보공소로 1957년 제9대 김영제(요한) 신주 재임시 공소를 건립하였으며, 현재 공소는 박진락(안드레아)씨 자택에서 치르고 있고 5세대에 12명의 신자로 구성되어 있다.
(2) 역대 공소회장
초대 : 김상식(도미니꼬) 재임기간 미상
2 대 : 김정호( 요 셉 ) 재임기간 미상
3 대 : 박진락(안드레아) 현재
(3) 현황
현소재 : 두동면 구미리 1031-3
현회장 : 박진락(안드레아)
세대수 : 5세대
신자수 : 12명(남 4명/여 8명)
16) 배내공소(1988. 3 ~ 현재)
(1) 연혁
공소 설립 이전 소속은 살티공소로 천황산, 간월산 등 높은 산들로 뒤덮힌 사 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 배내공소는 1988년 20대 김영곤(시몬)신부 재임 시절 신설되엇다. 현재 3세대 6명의 신자로 구성되어 있다.
(2) 역대 공소회장
초대 : 김학봉(바오로) 1988. 4. 3. ~ 현재
(3) 현황
현소재 : 상북면 이천리 산 1
현회장 : 김학봉(바오로)
세대수 : 3세대
신자수 : 6명(남 3명/여 3명)
|
3. 폐쇄공소
(1993년 현재의 자료입니다)
순번
|
공소명
|
존 속 기 간
|
폐 쇄 원 인
|
소 재 지
|
1
|
송대
|
1880-1927.5.24
|
본당창설로 승격
|
언양면 송대리422
|
2
|
간월
|
1815-1868
|
1860년 경신박해 여파
|
상북면 등억리 내간월 불당골
|
3
|
대재
|
1840-1868
|
1866년 병인박해 여파
|
상북면 이천리 산2
|
4
|
탑곡
|
1839-1983
|
마을이 없어짐
|
두서면 내와리 524
|
5
|
가천
|
1886-1969.4
|
교세약화 및 이농현상
|
삼남면 가천리
|
6
|
반곡
|
1958-1960
|
교세약화
|
언양면 반곡리
|
7
|
중리
|
1958-1963
|
교세약화
|
두서면 구량리
|
8
|
다개
|
1964-1985.11
|
교세약화
|
언양면 다개리
|
9
|
중남
|
(?)-1901-1916
|
교세약화및공소회장이사
|
삼남면 작하리
|
10
|
안살티
|
1840-1870 이후
|
병인박해이후 살티로이주
|
상북면 덕현리
|
11
|
언양
|
1880-1927.5.24
|
본당창설로 본당 관할구역
|
언양면 동부리(초등학교서편) |
|
|
4. 타본당(교구) 이속 공소
지역
|
공 소 명
|
설 립 연 월
|
소 재 지
|
경주
|
와항
|
1896년
|
경북 경주군 산내면 대현3리
|
진목정
|
1887년 이전
|
경북 경주군 산내면 내일 2리
|
범곡
|
1910년
|
경북 경주군 산내면 대현1리
|
울산
|
울산
|
1956년
|
경남 울산시 중구 복산동 489
|
아실
|
|
경남 울산군 웅촌면 곡천리 581
|
초정
|
1894년
|
경남 울산군 웅촌면 곡천리 371
|
양정(율동)
|
1909-1916년
|
경남 울산시 중구 양정동
|
신암
|
|
|
구영
|
1902년경,1946년
|
경남 울산군 범서면 구영리
|
굴화
|
1927이전,1946년
|
경남 울산군 범서면 굴화리
|
화산(마근)
|
|
|
양산
|
금산
|
1912년
|
경남 양산군 동면 금산리
|
증산
|
1927년
|
경남 양산군 물금면 증산리
|
원동(내포)
|
1884년
|
경남 양산군 원동면 내포리
|
양산
|
1923년
|
경남 양산군 양산읍 남부리
|
대석
|
1896년11월
|
경남 양산군 상북면 대석리
|
호계(범실)
|
1884년
|
경남 양산군 양산읍 호계리
|
반룡
|
1884년
|
경남 양산군 장안읍 반룡리 | |
|
|
제 7 장 본당 신심단체 현황
[2002년 현재]
단체명
|
설 립 취 지
|
주요활동사항
|
회원수
|
간 부 명
|
연령회
|
기도로서신앙생활 열심
|
장례주관
|
160
|
회 장
|
김팔곤(분 도)
|
총 무
|
김복철(안드레아)
|
성모회
|
회원상호간의 친목과 신앙생활 열심
|
회원 사망시
연미사와 기도
봉헌
|
63
|
회 장
|
이월연(말 다)
|
총 무
|
이복분(마 리 아)
|
자모회
|
주일학교 후원과 회원 상호간의 친목
|
주일학교 보조
|
50
|
회 장
|
신옥희(가타리나)
|
부회장
|
박애경(엠마누엘라)
|
류정순(마 리 아)
|
목신회
|
회원 상호간의 신앙 돈독과 본당발전에 이바지
|
본당협조
|
14
|
회 장
|
박대림(요 한)
|
총 무
|
김진홍(사베리오)
|
제대회
|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으며 자신의 신심향상과 거룩하신 성삼위께흠숭과 영광을 드리기 위해 본당의
전례를 정성을 다하여 마련하고 본당출신 새신부와 신학생 양성에보탬이 되고자
|
신학생 돌보기
제대관리
|
15
|
회 장
|
최미희(루 시 아)
|
총 무
|
조옥자(가타리나)
|
성가대
|
거룩한미사봉헌을 위해
|
미사,전례 협조
|
22
|
단 장
|
이송언(가브리엘)
|
부단장
|
이혜경(제노베파)
|
지휘자
|
정홍근(분 도)
|
교사회
|
주일학교 활성화
|
주일학교 돌보기
|
19
|
교
감
|
초등
|
이종필(프란치스코)
|
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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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기(레오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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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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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달숙(이사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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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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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호(비 안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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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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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사목과회원간 친선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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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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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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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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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기(미 카 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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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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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호(시 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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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관리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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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전시관 및 성지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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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관리
성지 돌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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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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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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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팔곤(분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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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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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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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가톨릭
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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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지역 신자들의 친목도모신앙심 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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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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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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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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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용(요 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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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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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노 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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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뜨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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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르실료 교육 수료자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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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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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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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준(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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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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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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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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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화(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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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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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주말부부 교육 수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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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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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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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판석(가브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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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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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주(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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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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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며 공부하고, 사도직삶을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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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수련,
본당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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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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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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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순(도로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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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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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혜(미카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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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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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제행사 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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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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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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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해(요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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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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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경(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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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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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자 신심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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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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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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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장
부회장
부회장
총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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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선(F.하비에르)
이종화(마르띠노)
장순덕(로 사)
박옥희(미카엘라) |
200년사 초기화면으로
@언양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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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양신용협동조합
2. 안나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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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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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양신용협동 조합
1) 개 관
신용협동조합(이하'신협'으로 표시)은 서민의 민생고와 고리채로부터 해방시키고, 조합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통하여 실추된 인권을 회복하고자 1849년 독일에서 라이파이젠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후 신협운동은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로 퍼져 순수 민간인 주도의 유일한 세계적 조직의 서민금융으로서 1960년 5월, 메리 가브리엘 수녀에 의하여 한국에 도입된 비영리 특별법인의 금융이다.
언양신혀은 1981년 5월에 언양천주교회 신자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1991년 5월말 현재 조합원 3,569명에ㅔ 50억여원의 자산을 형성한 서민금융으로 근검 절약 저축을 생활화하여 자조, 자립, 협동의 정신으로 잘 살기 위한 경제운동, 사회를 밝힐 교육운동, 더불어 사는 윤리운동의 3대 과제를 실천하여 복지사회건설을 지상목표로 삼는다. 신용협동조합은 조합원으로부터 각종 저축을 받는 수신업무, 소요자금을 대출하는 여신업무, 장학공제, 생명공제등의 공제업무를 민주주의 원칙에의하여 운영하는 금융조직으로 지방경제의 활성화는 물론, 남는 이익금으로 복지사업 등의 실천으로 지방에 환원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2) 설 립
(1) 설립일자: 1981년 5월 24일 (창립총회)
(2) 설립개요: 1980년을 전후하여 언양의 계파동 사건으로 불몸과 불신의 풍조가 만연하여 지역사회는 물론 그 여파가 교회내에까지 밀려 들었다. 이에 당시 언양천주교회 산하단체인 대건회에서 분석한 결과 종전에 한번 실패를 한 경험이있는 신용협동조합을 새로이 설립하여 고리채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아 당시 신협 부산시 지부와 접촉하면서 1981년 3월 15일에 교육과 동시 발기인 회의를 거쳐 당년 5월 24일 창립총회를 개최함으로써조합의 설립을 보게되었다.
(3) 설립목적: 공동유대내의 조합원이 신협정신으로 신협 3대과제를 실천하여 지상목표인 복지사회건설을 이룩하며, 상부상조를 협동정신과 접목시켜 조합원 전체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하여 이 조합이 설립되었다.
3)연혁
1980. 6. 언양천주교회 산하단체 대건회에서 신용협동조합 설립결정 운영위원에 박만선, 권문선씨 선출
1981. 3. 8. 언양천주교회 평신도협의회에서 사무실 무료 제공과 홍보에 협조키로 결정
1981. 3. 15. 발기인 회의
*발기인 18명 *발기인 대표: 장태원 선임
1981. 5. 1. 가칭 언양신용협동조합 실무책임자로 박만선씨 내정
1981. 5. 13. 가칭 언양신용협동조합 사무실 개설(매일시장 2층)
1981. 5. 24. 언양신용협동조합 창립총회 (48명 참석)
*조합원 : 50명 *자산 : 819.600원
*초대 이사장 : 장태원 피선
1982. 5. 10. 자산 1억원 돌파(102,182,351원)
1982. 6. 13. 사무실 확장 (13평)
1983. 2. 9. 재무부 인가필 (인가번호 10-115호)
1983. 2. 20. 재 2차 정기총회 (332명 참석)
*조합원 : 785명 *잣나 : 182,130,062
*재 2대 이사장 : 한흥준 피선
1983. 3. 1. 실무책임자 장태원으로 경질
1983. 3. 17. 법인설립 등기 (부산 지방법원)
1983. 3. 22. 연합회 가입, 법인설립 신고
1983. 4. 27
. 사업자 등록 (울산 세무서)
1984. 5. 1. 부산시 지부에서 경남도 지부로 소속 변경
1984. 5. 25. 안전기금 가입(제 512호)
1984. 10. 20. 경남 모범조합상 수상 (제 84025호)
1985. 1. 12. 자산 4억원 돌파
1985. 1. 20. 제 4차 정기총회 (531명 참석)
*조합원 : 1,195명 *자산 : 304,208,602원
*제 3대 이사장 : 한흥준 (재선)
1986. 2. 16. 제 5차 정기총회 (725명 참석)
*조합원 : 1,315명 *자산 : 455,893,287원
*이사장 : 강인수 보선
1987. 2. 15. 제 6차 정기총회 (665명 참석)
*조합원 : 1,452명 *자산 : 529,491,266원
*제 4대 이사장 : 강인수 피선
1988. 1. 31. 제 7차 정기총회 (693명 참석)
*조합원 : 1,568명 *자산 : 747,601,208원
*이사장 : 조말줄 보선
1988. 5. 2. 자산 10억원 돌파 (1,000,973,894원)
1988. 5. 14. 제 1회 조합원 견학교육 (66명 참가)
1988. 5. 30. 실무책임자: 박만선 씨로 재임용
1988. 6. 17. 공과금 대리수납 개시
1988. 12. 31. 신용협동조합법 개정 공포
1989. 2. 19. 제 8차 정기총회 및 사무실 이전 (1,136명 참석)
*조합원 : 1,864명 *자산 : 1,329,467,529원
*제 5대 이사장 : 조말줄 피선
1989. 4. 20. 제 2회 조합원 견학교육 (137명 참가)
1989. 7. 20. 자산 20억 원 돌파 (2,014,240,159원)
1989. 9. 24. 1989년 임시총회 (정관변경, 신협회관 매입 승인)
*박영철 선생: 장학기금 3천만원 희사
1989. 10. 26. 업무 전산화 개시
1989. 12. 31. 정관 변경등기
1990. 1. 10. 자산 25억 원 돌파 (2,533,829,284원)
1990. 2. 18. 제 9차 정기총회 (593명 참석)
*조합원 : 2,499명 *자산: 2,473,362,090원
*장학금 지급 : 56명에게 4,580,000원
*모범 졸업생 표창 : 21명 (부상: 289,800원)
1990. 3. 22. 자산: 30억 원 돌파 (3,075,336,828원)
1990. 6. 7. 자산: 35억 원 돌파 (3,523,328,682원)
1990. 7. 31. *조합원 : 3,000명 *자산: 3,560,453,857원
*경남 132개 조합중 자산규모 2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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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 나 유 치 원
1) 개 관
설립자의 세례명을 명칭으로 하고 있는 '안나 유치원'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소화 유치원'이 그 기원이 된다. 따라서 이 지방의 첫 유아교육사업이 실시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소화 유치원은 설립자이며 동정녀인 정복순(안나)선생이 직접 운영하면서 원감이 되고, 다른 두 동정녀를 보조교사로 하여 일제치하의 한글 말살정책에 대하여 국어교육이 시급함과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설립 2년 뒤인 1948년 5월 정안나가숙환으로 사망하자 소화유치원은몇 년간 더 지속되다가 6·25사변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언양성당 제 8대 주임 김재석(요셉)신부에 의해 1954년 1월에 '소화 유치원'이 재건되었으며, 1961년에 '4·19유치원'이라 개칭되어 5년간 존속하다가 다시 중단되었다.
1974년 김성도(모이세) 원장신부에 의하여 유치원을 설립자의 유지를 받들어 재정립하고 언양 상가시장과 유치원 건물을 신축 완공하면서 '안나 유치원'이라 개칭하여 초대원장 신부가 되어 1975년 제 1회 졸업을 시작으로 1990년 2월까지 제 16회에 총 588명을 배출하여 왔으며, 1990년 7월말 현재 2학급에 78명을 수용하고 있다. 안나유치원은 언양지방 유아교육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았음은 물론 몬테소리 교육을 가장 먼저 도입하는등 제 7대 김영곤(시몬) 원장신부,제 5대 안명화(베르나르다) 원감수녀와 3명의 교사가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2) 설 립
(1) 설립일자
제 1차 설립: 1946년 4월 정복순(안나)에 의해 '소화 유치원' 설립 1950년 까지 존속.
제 2차 설립: 1954년 1월 언양본당 제 8대 김재석(요셉) 주임신부 '소화 유치원'을 재 설립(1961년 '4·19유치원'으로 개칭, 1965년까지 존속)
제 3차 설립: 1974년 3월 초대 김성도(모이세) 원장신부에 의해 정 안나의 유지를 건물을 지어 최재선(요한) 주교에 의해 축성, 개원하므로 숙원사업이 이루어졌다.
(2) 설립개요
정복순(안나) 동정녀가 1946년에 시작한 유아교육 사업을 역시 정 안나가 기증 한 언양면 남부리 280번지 일원의 땅에다 1974년 현재의 유치원 건물을 지어 최재선(요한) 주교에 의해 축성, 개원하므로 숙원사업이 이루어졌다.
(3) 설 립 자
동정녀 정복순(안나) 연보
1907. 12. 11. 경상남도 언양군 상북면 서부리 1통 8호에서
아버지 정택하 씨와 어머니 오화순 씨의 제 6녀로 태어남.
1921. 3. 언양 공립 보통학교 졸업
1923. 9. 경남 부산 여자 고등보통학교 2년 편입
1926. 서울 경기 여자 고등보통학교 2년 편입 졸
1931. ∼1933. 부산 소화 유치원 고사 및 교회 전교봉사
1944. ∼1945. 언양 천주교회에서 전교사업 추진
1946. ∼1948. 언양 남부리 시장통에 소화 유치원 개설 운영
1948. 5. 7. 병석에서 유언 언양면 남부리 시장통의 소유토지와 건물에는 성당과 유치원을 건립하고 어음리의 소유토지와 건물에는 성모원을 설립하도록 하였음.
1948. 5. 10. 어음리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
동정녀 정복순(안나)은 당시 이 지방의 여성으로는 최상급 고등교육을 받은 분으로 중학교 교사를 역임하였으며, 특히 어린이를 사랑하여 평소 어린이들을 가까이 하여 무의탁 어린이 5∼6명을 양육하였으며, 전재산을 교회에 희사하였다. 특히 42세를 일기로 1948년 5월 12일에 사망하여 언양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릴 때 언양성당에 무지개가 서고 성전이 불꽃에 활활 타는 환상을 본 사람이 소방서에 언양성당에 불이 났다고 신고하여 소방대원이출동하여 소동이 있었다고전하여 온다. 학식과 덕망, 재산을 가지고도 세속의 삶을 버리고 동정을 지키며, 봉사의 외길을 걸은 일명 '언양의 성녀'로 부르는 정 안나는 정인섭 박사와 정인목 선생의 동생이기도 하다.
200년사 초기화면으로
@언양 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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