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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전시관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순교자 후손들의 본거지
언양 성당은 1888년 조선대목구 시절에 이미 본당 설립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본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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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굴

천연 석굴로 된 박해시대의 공소
《최양업 신부 서한집》 제19신(1860년 9월 3일자, 죽림)과 《병인치명일기》(제21권 148쪽)등의 기록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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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공소터 와 동정녀 김아가다 의 묘소가 있든곳

경남의 첫 공소인 간월 공소 터와 동정녀 김아가다의 묘소가 있는 곳
이곳에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숨어 있던 죽림굴에서 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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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티 공소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박해시대의 공소
간월 공소가 무너지자 거기에 살았던 신자들이 더 깊은 안살티로 들어가 정착하다가 점차 박해가 뜸해지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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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제 순교자묘

혹독한 고문으로 장하 순교한 김영제 순교자 묘
김영제(1827~1876, 베드로)의 조부인 김교희(일명 재권?, 1775~1834, 프란치스코)는 그의 육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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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천공소

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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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필 공소

1850년 경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 지방 전교 중 설립한 공소
선필 신자촌은 간월 교우촌과 함께 언양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교우촌이며 상선필·중선필·하선필 등 자연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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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선필 공소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전교시절 형성된 교우촌
하선필은 상선필에서 갈라져 나온 공동체다. 공소 설립 이전은 상선필 공소 소속이었으며 원래 경주 외남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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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곡 공소터

병인박해 이후 언양 지방의 교우촌
탑곡에 신자가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박해 시기이나 공소가 형성된 것은 한참 이후였다. 탑곡 교우촌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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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공소

경신박해 때 순교자를 낸 박해시대 교우촌
순정 교우촌도 간월과 선필 교우촌과 마찬가지로 박해 시대 때의 교우촌이다. 이 공소의 위치는 언양 본당과 ...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순교자 후손들의 본거지
언양 성당은 1888년 조선대목구 시절에 이미 본당 설립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본당 설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절영도에 부산의 첫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 당시 대구대목구 소속으로 있으면서 보드뱅(Beaudevin, 丁道平, 1897~1976, 에밀) 신부를 본당 신부로 하여 현 부산교구에서 두 번째로 본당이 설립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언양 지역의 첫 신앙 공동체는 이 지역 출신 오한우(1760~1801, 베드로)가 1790년에 영세한 뒤 1801년 신유박해 때 충청도 지역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피안 살수형(백지사?)으로 치명하였으며, 오한우와 같이 영세한 그의 육촌 매제인 김교희(일명 재권?, 1775~1834, 프란치스코)가 박해를 피해 내간월 불당골(현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하였고, 그리하여 언양 지역에는 이미 1800년대 초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문헌 자료에 의하면 언양 지방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01년 이 지역으로 유배를 온 강이문으로 부터 전교를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오치문(1804~1861, 오한우의 손자)에 의해서 인 듯하다. 이후 박해 시대인 1850년경부터는 번창한 신자촌으로 성장하였다.
언양 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 심한 타격을 입었다.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이 지역 최초의 순교자는 김사집(1845~1867, 필립보 또는 베드로)으로, 그는 1866년 11월 진영 포졸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5월(음)에 순교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이어 언양 대재[竹嶺] 교우촌에 살던 허인백(許仁伯, 1822~1868,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 등 3명이 1868년 9월 14일(양)에 체포되어 울산 장대에서 순교하였다.
박해가 끝난 뒤 교우촌이 재건되면서 1882년 대구(현 계산동) 본당의 주임으로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가 1883년에 살티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언양읍 공소도 설립되었다. 1904년에는 순정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이 세 공소의 신자 수는 153명에 달하였다. 이 지역신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1927년 5월 25일 언양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보드뱅(Beaudevin, 丁道平, 1897~?, 에밀) 신부가 부임하였다.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고 드망즈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전국적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시켰다. 그리하여 대주교 1명, 주교 1명, 수도회 관구장 2명의 출신지가 되었고, 또한 교구 내 가장 많은 16개 공소를 둔 본당으로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중심지가 되었다.

◆ 신앙유물 전시관

언양 지방 천주교 선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1990년 12월 4일 개관된 신앙유물전시관은 신앙 유물과 민속 유물 등 총 696점이 전시되어 있고, 신앙 유물은 교황청에 등록된 귀중한 자료다. 언양 천주공교협회 등 본당 단체들이 남긴 기록이 보관되어 있으며, 초기 교회 교우들이 사용하던 각종 기도서 교리서 등 고서, 그리고 미사와 전례에 사용했던 제의와 제구들도 전시되어 있다. 1800년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지역의 오래된 공소들이 사진에 담겨 진열되어 있으며, 2층에는 선조들이 생활 필수품으로 사용하여 온 민속품들을 전시하였다

◆ 성모 동굴

언양 성당의 뒷산에 위치한 성모 동굴과 십자가의 길에 대한 구상은 1927년경에 시작 되었다. 1926년 11월에 언양 성당 부지를 매입 하였고 그 다음해 정 보드맹 신부는 성당을 짓고 바로 뒷산에는 성모 동굴을 만들어 성모님을 모시자는 의견을 제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성모 동굴 조성사업은 실현되지 못하다2000년대희년을맞아 언양 성당이 순례 성당으로 지정되어 서정웅 지도 신부의 노력으로 각 공소 보수사업, 죽림굴 환경 미화 사업, 성모 동굴 조성사업 등에 전 교우들이 참가하여 과감하게 실천에 옮겨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성모 동굴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14처를 지나서 가게 되므로 성모 동굴과 십자가의 길은 다른 성당의 성모 동굴과는 달리 조성되어 있다.

■ 순교자

◆ 순교자 오상선(1840-1867) 묘
언양 성당 뒷산에는 오상선의 묘가 있는데 오상선은 이 지방에서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오한우(1760-1801)의 증손자이다. 오한우는 육촌 매제인 김교희와 함께 천주교를 받아들여 1790년경에 서울에서 세례를 받고 입교 하였다고 전해진다. 오한우는 서울을 왕래하며같은오씨문중의 오몽상과 권일신, 정약용과 교분을 두텁게 하고 <천주실의>와 교리 서적 몇 권을 얻어서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공부를 하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1801년신유박해 때 충청도와 경상도 경계 지점에서 피안살수형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의 손자 오치문과 증손자 오상선도 천주교를 받아들여 경신박해(1860)와 병인박해(1866)의 여파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언양현 상북면에 세거한 향리 집안이었기 때문에 오치문과 오상선은 집안의 힘을 빌어 읍 주변의 신자들을 보호하여 준 듯하다. 이 집안의 전교에 의하여 향리들까지도 천주교를 믿고 이들이 신자들을 보호하였다는 이사실은다른지역과는 상이한 점이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도록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순례지 정보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422
지리좌표 [성당 앞] 북위 35°34′20.8′동경 129°06′93.5′
연락처 언양 성당 (052) 262-5312 FAX (052) 262-5316
홈페이지 언양 성당 http://eonyang.pbcbs.co.kr/
미사시간 평일 : (수) 오전 10:00, (화목금) 오후 7:30(겨울 7:00), (토) 오후 4:00, 7:00
주일 : 오전 6:00, 10:30, 오후 7:00
교통편 [승용차] 경부고속도로로 오는 경우 서울산IC(삼남IC)에서 언양읍내로 진입하여 석남사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가면 읍내 끝 변두리에 성당이 있다.
부산교구의 성지
경남의 첫 공소인 간월 공소 터와 동정녀 김아가다의 묘소가 있든 곳
!!!! 이곳은 김영제 순교자 묘소로 이전하였습니다.!!!!
이곳에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숨어 있던 죽림굴에서 최 신부를 돕다가 죽은 동정녀 김 아가타(김교희의 손녀, 1837~1860)의 묘가 있다. 간월 지역은 처음 경주 김씨인 김교희(일명 재권?,1775~1834, 프란치스코)집안을중심으로하여 박해를 피해 모여든 신자들에 의해 지형적인 조건이 좋아 일찍부터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김교희는 아들 김상은(1804~?, 야고보)과 손자인 증거자 김영제(1827~1876, 베드로), 손녀 김 아가타(동정녀) 등 온 가족을 영세 입교시켰다.
간월 교우촌은 1837년과 1838년에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의방문을받아조직이 보충되었다가,1839년 기해박해로 다시금 흩어졌다. 1840년 다시 돌아온한 가족(김상은 가족으로 추정)이 친척, 친구들에게 전교하여 새로운 교우촌이 이루어졌으며,1845년 다블뤼 주교가 방문하였을 때는 예비신자가 150명이나 되는 큰 공동체가 되었다. 1850년에는 최양업 신부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1860년, 이곳에도 경신박해의 여파가 미쳐 이 지방은 온통 큰 박해의 회오리에 휩싸이게 되었다. 마침 이곳에 순회 전교를 왔던 최양업 신부가 박해를 피해 죽림굴로 피신했고, 17명의 신자들은 체포되었다. 이때 이 언양 지방 첫 신자가문인해주 오씨 오한우(1760~1801,베드로)의 손자인 오치문(1804~1861)이 순교했다고구전한다.
오씨 집안과 관련한 구전에는 오한우의 증손자인 오상선도 1867년 병인박해의 여파로 사망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순교한 인물이 오치문인지 오상선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두 명 모두 천주교를 믿고 전교한 사실은 확실하다. 이렇게 해서 교회 강당은 물론이고 온 마을이 불타 버렸으며, 이곳 간월 공소 신자들은 간월 산중으로 피신을 하여 노숙을 하면서 몇 년 동안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결국 경남의 첫 공소로 알려진 간월 공소(1815~1860)는 1860년의경신박해로일단 해체되고 말았다.
그때 포졸들에게 붙잡혀 갔다가 다시 풀려나온김 아가타는 17세, 18세의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해서 잡혀가기를 청했다. 압송되던 이들은 농락하려는 포졸들을 피해 간신히 도망쳤다.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 의하면, 김 아가타는 포졸들에게 풀려난 뒤 숱한 고생을 겪다가 최양업 신부가 있는 죽림으로 와서 탈진한 채 몸져누워 곧 임종을 맞았다고 한다. 동정녀가 세상을 뜨자 최양업 신부와 교우들이 이 동정녀의 시신을 본가로 옮기기 위해서 시체를 만지자, 갑자기 그녀 밑에 깔아 놓았던 솔가지 위에 큰 붉은십자가가보였다고 한다. 죽림굴에서24세의 나이로 선종한동정녀 김 아가타의 무덤은옛 간월 공소 뒷산에 안장되어 있다.

◆ 최양업 토마 신부님의 편지
경신박해(1860)의 언양지역 상황에 대해 최양업 신부님이 쓰신 서한 중 김 아가다에 대한 내용이다.-

"예수 마리아 요셉
죽림굴에서 1860년 9월 3일 리보아 신부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공경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에게 공동편지를 보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 편지를 두 분뿐만 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에게 보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중략)
24세 된 동정녀가 있었는데,교리에 밝고 열심하여 모든 신자들 중에서출중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위주치명하기를 원하더니 자기 부친과 다른 신자들이 체포될 때 포졸들한테 가서 자기도 같은 신자이니 잡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신자들의 만류로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거기서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포졸한테 가서 잡혀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때 이 동정녀가 가르치며 선생처럼 지도한 두 처녀를 묶어가지고 가다가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으므로 저들을관가로데려가지 않고, 처녀들을 농락하고나서 다른 데 팔려고 했습니다. 그것을알아차린 세 처녀들은 놓아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놓여났습니다. 동정녀의 이름은 아가다였습니다. 아가다의 부친과 오빠가 감옥에 갇혔고, 집도, 갈 곳도 없어 방황하다가 마침내 내게로 왔습니다.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둘러있던 신자들과 같이 임종경의 마지막 말마디를 끝내자 아가다는 운명하였습니다. (하략)"
조교구사제 최토마 올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어떠한 시련에서도 주님을 외면하지 않는 신앙정신을 갖도록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간월
지리좌표 [묘소 앞] 북위 35°33′91.5′ 동경 129°03′41.1′
연락처 언양 성당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422) (052) 262-5312 FAX (052) 262-5316
홈페이지 언양 성당 http://eonyang.pbcbs.co.kr/
미사시간 [언양 성당]
평일 : (수) 오전 10:00, (화목금) 오후 7:30(겨울 7:00), (토) 오후 4:00, 7:00
주일 : 오전 6:00, 10:30, 오후 7:00
교통편 [승용차] 언양에서 등억온천을 지나 간월 자연휴양림 입구 거의 다 가서 좌측에 일송정산장 마당을 지나 약 200m 오르면 묘소가 있다. 언양에서 8km 약 20분 거리에 있다.
천연 석굴로 된 박해시대의 공소

《최양업 신부 서한집》 제19신(1860년 9월 3일자, 죽림)과 《병인치명일기》(제21권 148쪽)등의 기록에 의하면 언양에 대재[竹嶺里]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형성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단지 기해박해(1839년) 이후 피난 다니던 신자들이 더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매다 정착했으리라 추정된다.

경신박해(1860년) 때 포졸들에게 잡혔던 동정녀 김 아가타가 죽림굴로 피신하여 신자들의 임종경을 들으며 죽었다는 사료와 1868년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허인백(許仁伯, 1822~1868,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1819~1868, 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 등이 죽림굴에 숨어 있었다는 《병인치명일기》의 기록으로보아 대재 공동체가 각지에서포졸을피해피난다니다가 온 신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죽림굴은 천연 석굴로 된 공소다. 간월 공소에서 왕방재를 넘어 왕래한 피난 공소로 기해박해 후 충청도 일원과 언양 각처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더욱 안전한 곳을 찾아 정착한 죽림굴은 1840년부터1868년까지 28년간 공소로 사용되었다. 위 기록에 의하면 '이양등은 울산 죽령리(竹嶺里, 대재) 공소의 회장이며, 그 생업은 꿀 장사였는데 1868년 허 야고보와 김 루카와 함께 참수 치명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를 통해 대재 공소의 회장은 이양등임을 알 수있다.

대재 공소 주변에는 관아의 손길을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던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재 넘어 간월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100여 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연기를 내지 않기 위해 곡식을 물에 불려 생식을하며 생활하였다. 그후이굴의공소는 병인박해의 여파로 해체되었다. 죽림은 국내 유일의 천연 석굴로 한국판 카타콤이라고 할 수 있다.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 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1857년 주교)와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사목을 담당하였고, 특히 경신박해(1859~1860) 때에는 최양업 신부가 이곳에서 약 3개월간 은신하며 미사를 집전하였고 마지막 서한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는 이곳에서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한채교우들과함께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스승에게 마지막 서한(1860년 9월 3일자)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애처로운 모습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 최양업 토마 신부님의 편지
경신박해(1860) 때 언양 지역 상황에 대해 기술한 편지이다.

"예수 마리아 요셉
죽림굴에서 1860년 9월 3일 리보아 신부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공경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에게공동편지를보내는것을 용서하십시오. 이 편지를 두 분뿐만 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에게 보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박해의 풍파로 한 모퉁이에 갇혀서 신자들과 아무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어져 그들의 생사도 모릅니다. 이 편지도 중국에까지 도착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박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어 신부님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내 지방에서 17명이 체포되었는데, 남자가 14명, 여자가 3명입니다.남은신자들도다그들 지방에서 쫓겨나 집과 전답과 가산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의지할 데도 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잡힌 신자들은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가정 물건들은 포졸들이 약탈했거나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신자 친척이나 신자 친구들을 피신시켜 주었던 외교인들도 신자들과 같은 운명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동리의 주민들이 신자들 때문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신자들로 하여금 아무 데도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결의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잡아 가둘 수도 없고, 다 재판에 회부할수도없다고 생각하고,포졸들을여기저기 파견하여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또 외인들을 충동하여 신자들을 적발하게 합니다. 이 방법이 신자들에게는 더 가혹하고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체포된 17명 중 3명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왜 석방되었는지 원인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배교한 것 같습니다. 2명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1명은 대구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요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열심한 여신자가 하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천주교에 나오게 인도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노파는체포되어용맹히 신앙을 증거한후 혹독한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10명이 경주 감옥에 갇혀 있는데 3명은 문초를 당할 때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고생하며 함구합니다. 그들 중 16세 된 소년이 있는데, 옥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하략)
조교구사제 최토마 올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신망애 삼덕을 증진하도록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순례지 정보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2
지리좌표 [굴 입구] 북위 35°32′82.7′ 동경 129°01′97.0′
연락처 언양 성당 (052) 262-5312 FAX (052) 262-5316
홈페이지 언양 성당/죽림굴 http://eonyang.pbcbs.co.kr/
미사시간 [언양 성당]
평일 : (수) 오전 10:00, (화목금) 오후 7:30(겨울 7:00), (토) 오후 4:00, 7:00
주일 : 오전 6:00, 10:30, 오후 7:00
교통편 [승용차] 경부고속국도 서울산 IC에서 석남사 입구, 배내 고개를 넘어 간월산 휴양림지구와 죽림굴 안내판이 좌측에 7.4km를 표시하고 있다. 여기서 산길을 따라 가면 간월재가 나오고 그곳에서 우측으로 산 비탈길을 내려가면 오른쪽 벼랑에 죽림굴이 있다. 또는 더 내려가서 3,5km라고 표시한 곳에서 산길을 오를 수도 있다. 새로 포장하여 차로 죽림굴까지 오를 수 있다.
부산교구의 성지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박해시대의 공소

간월 공소가 무너지자 거기에 살았던 신자들이 더 깊은 안살티로 들어가 정착하다가 점차 박해가 뜸해지면서 논밭을 경작할 수 있는 살티로 옮겨 와 살티 교우촌을 이루었다. 증거자 김영제(1827~1876, 베드로)가 1876년 형장으로 인해 장독사(杖毒死)한 곳이며, 최재선(崔再善, 요한) 주교를 비롯하여 많은 성직자를배출한 성소의고장이기도하다.

1868년에 설립된 살티 공소는 언양 지방의 간월 공소(1815~1860), 대재 공소(1840~1868)에 이어 설립된 공소로서 경상북도 청도군과 경상남도 밀양군·울주군의 경계 지점에 있는 가지산(1239m) 중턱에 위치한 첩첩산중의 신자촌이었다.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예로부터 전쟁을 위한 화살을 만들었던곳이라 해서시현(矢峴)이라는뜻과박해를피해 와 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살티, 살틔, 살터, 시현 등으로 표기되어 왔다.
간월 공소에서 살았던 김영제 베드로의 집안과 서울에서 양반으로 살던 남의선 안드레아 가정, 이루수 가정, 최일문 베드로 가정, 1884년 페낭으로 유학 가 신부가 된 김문옥(金紋玉, 1873~1941, 요셉) 신부의 조부 김경두 가정 등이다시이곳으로 이주해왔으며,그외에 이씨 가정, 즉 이종창(李鍾昌, 1934~1961, 바르톨로메오) 신부 선대 및 정씨, 곽씨 가정들도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살기 시작했다. 살티 성지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김영제 베드로는, 조부인 김교희(일명 재권?, 1775~1834, 프란치스코) 일행이 박해를 피해 들어간 간월골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김영제 베드로는 부산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경상도 지방을 담당한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1857년 주교로 승품) 및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를 맞이해 공소를 설립하고1858년에는 공소 건물을짓기도했다.
무진박해로 1868년 7월 체포된 김영제는 서울로 압송되어 심한 고문으로 종지뼈가 으스러져 떨어져 나가 불구의 몸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흩어진 가족들을 수소문해 안살티에 정착한 그는 여기서 다시 공소를 설립해 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현재의 살티로 옮겨 와서 살았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결국 1876년 순교적 삶을 마감하였다.
아직도 이곳에 신앙의 후손들이 남아 지키고 있다. 후손들에 의해 순교 성인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살티는 최재선주교, 김문옥 신부, 이종창신부,김윤근(金潤根,1950~1977, 베드로) 신부 등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의 고장으로 자라났다.

▒ 최재 (崔在善) 주교
최재선(1912~2008, 요한) 주교는 초대 부산교구장으로 경남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에서 출생. 1932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 중등과·철학과를 거쳐 1938년 6월 11일 신학과 졸업과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뒤 전북 수류 본당 주임 신부를 비롯 여러 본당을 거쳐, 1957년 부산교구가 대구교구로부터 분할, 창설되자 초대 부산교구장에 임명되어 이해 5월 30일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그 뒤1973년 교구장직을사임할 때까지 15년 동안 초대 부산교구장으로서 부산교구의 교세 신장에 주력, 36개의 성당을 신축하고 부산교구 발전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내에 성소가 더 많이 증가하도록 빌어 주소서.

▒ 해야 할 사랑 나의 꿈은 (살티에서) <김영수> ▒

'숨어서살만한터'였나요
석남사 물소리 넘어오는 곳 살티
햇살은 아침 안개들을 잘게 부수고
바람소리 드맑아
눈물 아리게 피어납니다
참으로 멀리에서
놀안고돌아오는흰구름들은
죽어서 산 이의 미소로 나를 깨웁니다
해야 할 사랑 나의 꿈은 아득한데
언제 쯤 나의 서툰 노래에도
물소리 푸르게 묻어날까요
목숨 아슬히 밝히는 별빛 어릴까요
절망이나설움도알고보면
사랑을 덮고 있는 시린 바람입니까
내 작은 가슴 위에도
눈물 범벅으로 무지개 뜨는 날 있기를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살티길 9
지리좌표 [공소 앞] 북위 35°36′66.5′ 동경 129°02′43.5′
연락처 언양 성당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422) (052) 262-5313 FAX (052) 262-5316
홈페이지 언양 성당 http://eonyang.pbcbs.co.kr/
미사시간 [언양 성당]
평일 : (수) 오전 10:00, (화목금) 오후 7:30(겨울 7:00), (토) 오후 4:00, 7:00
주일 : 오전 6:00, 10:30, 오후 7:00
교통편 [승용차] 경부고속국도 언양 IC에서 나와 24번 국도를 따라 석남사 입구에서 좌측 길로 접어들어 1km쯤 가면 안내 푯말이 보인다. 좌회전하여 100m 들어가면 살티 공소이다.
부산교구의 성지
혹독한 고문으로 장하 순교한 김영제 순교자 묘

김영제(1827~1876,베드로)의조부인김교희(일명 재권?, 1775~1834, 프란치스코)는 그의 육촌 오한우(1760~1801, 베드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의 활동 인물인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등 양반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익히고 영세한 후, 1801년 신유박해를 당하여 언양의 간월골로 피신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끌었다.

김영제 묘는 부산 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인 살티 공소에 모셔져 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간월골에서 부친(김상은)과 여동생(동정녀 김 아가타)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된 김영제는 경주부(慶州府)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서 허인백(許仁伯,1822~1868, 야고보) 등 울산의 순교자 세 사람을만나 순교하기로 결의했으나,이들3명은울산으로이송되어 순교했고, 김영제만이 중죄인으로 분류돼 대구 감영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김영제 베드로는 일찍이 그 위세가 지방에 크게 떨치던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의 조부 김교희 프란치스코는 인척인 오한우와 함께 당시 서울을 왕래하면서 천주교회의 창설기 활동가인 권일신, 정약용 등 양반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익히고 함께 영세함으로써 언양 지방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로 간월을 떠나 경북의 자인골, 청도 정자동, 월성군 탑곡 등을 전전하며 피해 다니다 박해의 칼날이 무디어진 1850년 12월 다시 간월의 불당골로 돌아왔다. 간월로 돌아온 김영제는 부산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당시 경상도 지방을 담당한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 및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신부를 맞이해공소를설립하고1858년에는공소 건물을 짓기도 하였다.
무진박해가 경상도 지역을 휩쓴 1868년 7월 김영제는 두 번째 체포되고 간월 공소, 대재 공소도 함께 파괴된다. 그는 경주부(慶州府)로 이송되고 중죄인으로 분류돼 대구 감영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극심한 고문과 문초를 당해 그는 종지뼈가 으스러져 떨어져나가 불구의 몸이 되었으나 1869년 봄, 마침 나라에 경사가 있어 특별히 사면되어 죽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흩어진 가족들을 수소문해 안살티에 정착한 그는 여기서 다시 공소를 설립해 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현재의 살티로옮겨와 살게 된다.하지만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결국 1876년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 장하치명(杖下致命)
박해로 체포된 교우들이 곤장(棍杖), 태장(笞杖), 주장(周杖), 평장(平杖) 등 주로 장(杖)을 사용하는 형벌을 받아 신문 도중이나 신문 직후 순교한 것을 말한다. 신유박해 때의 권철신과 성인 최경환, 남경문, 김임이, 이간난 등을 비롯, 많은 교우들이 장하치명하였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모든순교자들이시여,
●우리교우들이 어떠한 어려움도 잘 이겨내도록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144-3
지리좌표 [묘소 앞] 북위 35°36′37.3′ 동경 129°02′29.0′
연락처 언양 성당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422) (052) 262-5312 FAX (052) 262-5316
홈페이지 언양 성당 http://eonyang.pbcbs.co.kr/
미사시간 [언양 성당]
평일 : (수) 오전 10:00, (화목금) 오후 7:30(겨울 7:00), (토) 오후 4:00, 7:00
주일 : 오전 6:00, 10:30, 오후 7:00
교통편 [승용차] 경부고속국도 언양 IC에서 나와 24번 국도를 따라 석남사 입구에서 좌측 길로 접어들어 1km쯤 가면 안내 푯말이 보인다. 좌회전하여 300m 들어가면 김영제 묘이다.
부산교구의 성지
1850년 경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 지방 전교 중 설립한 공소

선필 신자촌은 간월 교우촌과 함께 언양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교우촌이며 상선필·중선필·하선필 등 자연 부락으로 나뉘어져 있다. 공소 설립 이전은 탑곡 공소 소속이었고, 경북 외남면과 경계를 이루며 고헌산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교우촌이다. 《벽위편》에 의하면 “1801년 주문모 신부에게 교리를배워 입교한 강이문(세례명미상)이언양으로귀양감”이라고나오는데 그 귀양지가 탑곡인 것으로 추측되므로 그 이후에 신자들이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강이문으로부터 전교를 받은 경주인 예씨(芮氏, 본명 미상)가 친족 5세대를 이끌고 이곳 선필로 옮겨 와서 1805년부터 예씨 일가의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한때는 예씨네 골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 후 1815년 을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충청도와 경북 지방에서 피난 온 김씨,이씨, 최씨 등이 예씨네 일가와합세하여큰필 교우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울주의 최 시몬 가정은 강원도로 피난을 갔다가 결혼 후 다시 고향 근처인 선필 교우촌으로 와서 대대로 한의원을 하면서 공소 회장을 맡아 봉사하고, 1891년에는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1866~1904, 레오) 신부를 3개월간 집에 모셨다.

한편 상선필의 공소는 원래 경주 내남면에 살던 경주 이씨가 치명을 당하자 그 후손들이 내와리의 탑곡으로 왔다가 다시 이곳 상선필에 들어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1850년 5월 주일 첨례를 봄으로써 공소가 처음 설립되었다고 한다. 처음의 공소 건물은 뒤테르트르 신부가 거처하던 집이었다. 이곳은 공소 설립초기부터 많은 전교 신부들이 거쳐 갔다. 이미 공소 설립 이전인 1839년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가 1차와 2차로 전교를 하였고, 그후 1845~1849년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가 이곳 상선필에 들러 성사를 주었다. 그러다가 1850년경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지방으로 전교를 시작하면서 신자들이모여들었고 실질적인 공소가되었다.
1893년도당시상선필 공소의 회장은 최 시몬의 사위인 한광호 베르나르도였다. 그는 청주 한씨 집안으로 대대로 관직에 나아간 양반이었는데 그 선대 한용식 요셉 때부터 천주교를 믿고 몰락 양반으로서 계속 피난하며 다니다가 상선필로 들어온 집안이다. 자손들이 상선필(한광호 베르나르도), 하선필(광호의 큰 아들 한문필 베드로), 탑곡(광호의 조카 한경삼 시몬), 언양읍(광호의 둘째아들 한운필 타대오)으로 흩어져 살며 이주해 간 지역에서 교우촌을 이루었다. 초기 선조 신앙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상선필 공소도 도시화의 물결 속에휩쓸려많은 교우들이새 삶의보금자리를 찾아 떠나 버리고 지금은 4세대 약 7명의 신자들이 옛날에 번창하였던 상선필 공소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 뒤테르트르(Dutertre)
뒤테르트르(1866~1904) 신부는 1891년 한국에 들어와 이천 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청일 전쟁과 동학 농민 운동을 겪으며 전교에 힘썼다. 강원도 이천과 원주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교안(敎案) 사건에 휘말려 곤경을 겪었다. 그 하나가 1900년 11월에 이천군 귀당(龜塘)에 사는 김순식과 김응섭 등이 성당을 파괴하고 뒤테르트르 신부를 폭행한 사건으로,이른바'뒤테르트르신부 사건'이라고하는 교안이다.
다른 하나의 교안은 1901년 원주에서 발생한 것으로, 뒤테르트르 신부가 강원도 관찰부에 함부로 들어가 관에 압력을 가했다는 오해를 받은 사건이다. 이러한 불행한 일들을 겪고도 계속해서 이천 성당의 사목을 담당하여 전교에 힘썼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공소 순방 중에 성홍열(또는 홍역)에 감염되어 1904년 3월 11일 평강(平康) 근처의 거릿말에서 세상을 떠났다.유 해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자치봉 언덕에 안장되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인보리 상선필 1049
지리좌표 [공소 앞] 북위 35°39′90.9′동경 129°07′39.7′
연락처 언양 성당 (052) 262-5312 FAX (052) 262-5316
인보 성당 (052) 263-9004 FAX (052) 263-9006
상선필 공소 회장 정원규 토마스 (052) 252-0039
홈페이지 언양 성당 http://eonyang.pbcbs.co.kr/
미사시간 [인보 성당]
평일 : (수금) 오전 10:00 (토) 오후 7:00
주일 : 오전 10:30
교통편 [승용차] 언양에서 경주국도로 8 Km 지점 인보에서 서쪽 골짜기로 5.4 Km 지점에 있다.
부산교구의 성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전교시절 형성된 교우촌

하선필은 상선필에서 갈라져 나온 공동체다. 공소 설립 이전은 상선필 공소 소속이었으며 원래 경주 외남면 지역으로 조선 고종 광무 10년(1906년)에 울산군 두서면에 편입되었다. 상선필, 살티에서 살던 신자들이 혼인으로 하선필로 옮기게 되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는데 상선필, 살티보다 더 큰 공소가되었다.

하선필 공소는 지리적 위치로 보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전교 시절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1852년 5월). 그 후 1893년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 일행이 상선필 공소 방문 중 하선필에 살던 최 시몬(당시 78세)의 집에 방문하면서 그의 집이 공소로 사용되었다. 하선필 교우촌은부산, 경주, 양산 등지에서피난온집안들로이루어졌다. 이들의 구성원은 한의사, 몰락 양반, 향반으로 기억되는 계층들로 상선필, 살티에 피난 와 정착했던 다음 세대들로 이루어졌다.
이중에서 청주 한씨, 경주 김씨, 경주 최씨는 서로 인척 관계다. 이들이 하선필의 산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며 교우촌을 이루어 갔다. 한의사인 최세형(1816~1895, 시몬)은 동래부에서 하선필로 이주해 왔다. 청년기에 불교에 심취하여 인도에서 3년간 불교를 연구하고 돌아오던 중 청국에서 선교사를 만나 2년간 천주교를 배워 시몬으로 영세하였다. 박해 때 단신으로 강원도 평해로 피난하고그곳에서김로사와혼인하여 하선필에 정착하였다. 하선필 공소 회장을 역임하며 자식들에게 신앙 교육은 물론 한의를 전승시켰다.

하선필로 이주해 온 한문필(베드로)은 상선필 회장 한광호의 큰아들이다. 하선필에 언제 이주해 왔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하선필의 경주 최씨 집안과 혼배 후 옮겨 왔으리라 추정된다. 김문익은 살티로 피난 온 김경두의 손자로 1884년 페낭으로 유학가서 신부가 된 김문옥(金紋玉 , 1873~1941, 요셉)과 형제간으로 필의 청주 한씨집안과의혼인으로인해1893년 이후 선필로 이사하여 하선필에 정착하였다.
그 후 김문익 공소 회장을 비롯한 초기 역대 공소 회장들의 노력으로 뮈텔 주교를 비롯,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8, 플로리아노) 주교 등 많은 성직자들이 거쳐 갔으며 한때는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1866~1904, 레오) 신부가 3개월간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간월, 대재, 살티를 비롯 초기 선조 신앙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하선필 공소도 다른 공소와 다름없이 많은 신자들이 도시화의 물결 속에 하나, 둘씩 고향을 떠나새로운 삶을 향해 나가고 현재는9세대 15명내외가공소를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하선필 680
지리좌표 [공소 앞] 북위 35°39′08.0′동경 129°06′33.3′
연락처 언양 성당 (052) 262-5312 FAX (052) 262-5316
인보 성당 (052) 263-9004 FAX (052) 263-9006
하선필 공소 회장 이종술 베드로 (052) 262-6167
홈페이지 언양 성당 http://eonyang.pbcbs.co.kr/
미사시간 [인보 성당]
평일 : (수금) 오전 10:00 (토) 오후 7:00
주일 : 오전 10:30
교통편 [승용차] 언양에서 경주국도로 8 Km 지점 인보에서 서쪽 골짜기로 2.6 Km 지점에 있다.
부산교구의 성지
병인박해 이후 언양 지방의 교우촌

탑곡에 신자가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박해 시기이나 공소가 형성된 것은 한참 이후였다. 탑곡 교우촌은 경주, 밀양, 의성에서 피난 온 고령 박씨, 밀양 박씨, 반남 박씨 집안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외교인을 영세시키고 또 혼인을 통해 광주 이씨, 안동 권씨 집안 등이 이주해 옴으로써 1910년대에전성기를 누려 100명이넘는신자들로발전해나갔다.

탑곡에 제일 먼저 피난 와 살았던 집안은 경주 내남면에서 이주해온 고령 박씨 집안이다. 선대에서는 박진남이 정3품인 훈련원정(訓鍊院正)에 나아갔으며, 그 아들 상빈은 통덕랑(通德郞)에 나아갔으나 그 뒤로 부터는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그 후손 박정표(1806~1863)가 천주교를 믿게 되어 피난 다니면서탑곡으로 이주해 왔다.아들영호(1827~?)대에 선필에서 살다가 탑곡으로 정착하였다.
박해시기 동안은 안정적이지 못하여 이 집안도 탑곡, 선필로 옮겨 다녔다. 영호 대에 식구가 늘자 문하(1858~1941)는 그 옆 내와로 이주 하여 내와 공소를 이끌어 갔고, 숙하(1864~1935)는 탑곡 공소를 이끌어 갔다. 이외에도 경주 우중골 향반이었던 경주 김씨의 일족으로 김경민은두서면미호로피난왔다.아들득종(1884~ ?) 대에 탑곡으로 이사 왔으며, 손자 문하(1873~ ?)는 탑곡에서 혼인하고 공소 회장 및 교리 교사를 맡아 지도하다가 1910년에 다시 미호로 옮겨가 미호 공소를 이끌어 갔다. 또한 직동에서 한의사를 하던 밀양 박씨 집안의 둘째 아들인 박종갑(1852~1921)이 탑곡으로 이주해 왔으며, 의성에서 교우촌을 찾아 이주해 온 반남 박씨는 탑곡에서 교리 교사도 하고, 부산 범일동 본당에서 신부 복사도 한 집안이다. 이들이 초기에 탑곡 공소를 이끌어 가던 교우들이다.
언양 성당 신앙 물전시관전시실 한 켠에는탑곡공소에서 쓰던 공의회이전제대, 라틴어 미사 경문, 전례 도구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탑곡 공소는 여름 태풍 때 피해를 입었는데, 이 물건들은 그전에 가져온 것이라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재 이곳은 개인 소유의 땅이며 공소터를 알려 주는 아무런 표지도 없다. 주변에는 기독교 계통의 건축물들이 신축되고 있었다(2008년 5월 현재). 이곳 산너머 내와리에 한 가구만의 신자가 살고 있다고 한다.


▒ 통덕랑(通德郞)
통덕랑은 직책이나 관직의 이름이 아니라, 조선 시대의 문반계(문신) 정5품 상등에 내려주던 품계명으로 일종의 작위다. 향반들의 관인 신분 세습을 위해서 일정 경우 관직 진출을 못한 향반의 장자에게 명예직으로 주어지기도 했다. 현재 기준으로 대략 5급 공무원(면장 정도)으로 이해하면 것이다.

■ 찾아가는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내와리 524
지리좌표 [공소 터] 북위 35°40′93.0′동경 129°07′25.0′
연락처 언양 성당 (052) 262-5312 FAX (052) 262-5316
인보 성당 (052) 263-9004 FAX (052) 263-9006
홈페이지 언양 성당 http://eonyang.pbcbs.co.kr/
미사시간 [인보 성당]
평일 : (수금) 오전 10:00 (토) 오후 7:00
주일 : 오전 10:30
교통편 [승용차] 언양에서 경주국도로 8 Km 지점 인보에서 서쪽 골짜기로 약 10km 내와리에 있다. 산길에 표지판이 없어 안내를 받는 것이 좋다.
부산교구의 성지
경신박해 때 순교자를 낸 박해시대 교우촌

순정 교우촌도 간월과 선필 교우촌과 마찬가지로 박해 시대 때의 교우촌이다. 이 공소의 위치는 언양 본당과 살티 공소 중간 지점이며, 얼마 떨어진 동쪽으로 뒤편에는 간월산(1053m)이 우뚝 솟아 있다. 순정 공소 관할 구역은 1860년경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는지 확실히알 수 없으나, 아마 순교자김베드로때인듯하다.

후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순교자 김 베드로는 청도 김씨로 조부 때에 이곳 순정으로 이사를 왔고, 그리하여 그의 가정은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공소 첫 신자인 김규홉의 아들 순교자 김 베드로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860년 경신박해 때 대구 약령시에 한약 재료를 구입하려고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했다고한다.한편그때그의 몸종도 함께 따라갔다가 베드로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것을 보고서 그분의 십자가를 유품으로 받아서 본가에 전한 후에, 다시 순교자를 따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에도 김 베드로의 가족들은 계속 이곳에서 살면서 대를 이어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으며주위에 외교인들이많이 입교해서 현재는 1958년도에분가해서나간길천공소의 신자들과 합해서 100여 명의 신자들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1913년 12월 16일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8, 플로리아노) 주교에 의해 축성된 공소 건물은 언양 본당 설립 전까지는 남방 지역 선교사들의 휴양지로서 오랫동안 미사를 드린 곳이며, 부산진 본당 소속 공소 회장들의 피정과 회의장으로도 사용되었다. 길천 공소와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으며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순교자 김 베드로의 후손 중 장손자 김영은 야고보는 초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님의 복사로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교회에크게 공헌하였으며,차손김영제(金永濟,1896~1966,요한) 신부도 언양 본당의 9대 신부로 봉직했었다. 또한 마산교구의 김두호 몬시뇰과 김달호 교수(경북대), 언양 본당의 김경희 전 회장은 그분의 증손자이다. 현재 신자는 5가구에 불과하고 현재 공소 회장은 순교자의 후손 김태호 씨가 맡고 있다.
길천 공소는 1958년 8월 25일 김영제 신부에 의해 순정 공소에서 분리되었다. 그후 이농 현상으로 교세가 약화되자 1980년에 다시 순정 공소와 통합되었다.

▒ 길천 공소
길천 공소는 1958년 8월 25일 김영제 신부에 의해 순정 공소에서분리 되었다. 그 후농민들의이농 현상으로 교세가 약화되자1980년에 다시 순정 공소와 통합되었다. 약 700평 대지에 약 30평의 공소 건물이 있어 신심단체 회합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1960년대 까지는 교세가 가장 큰 공소이기도 했다.
건물과 경내를 단장하여 산간학교나 피정장소로 사용하기위해 2001년 보수공사를 하여 많은 성지순례 방문객들이 방문하였다. 특히 학생들의 산간학교와 레지오 단원들의 피정 장소로 많이 활용되었다. 본당에서 약6km 지점에 있으며 상북면 자동차 면허 시험장에서 고려개발 알루미늄을 지나 후리동네 한가운데위치하고 있으며 순정공소와는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 찾아가는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지리좌표 [공소 마당] 북위 35°34′97.4′동경 129°04′58.5′
연락처 언양 성당 (052) 262-5312 FAX (052) 262-5316
순정 공소 회장 김덕호 (052) 262-0502
홈페이지 언양 성당 http://eonyang.pbcbs.co.kr/
미사시간 [언양 성당]
평일 : (수) 오전 10:00, (화목금) 오후 7:30(겨울 7:00), (토) 오후 4:00, 7:00
주일 : 오전 6:00, 10:30, 오후 7:00
교통편 [승용차] 언양 본당과 살티 공소 중간 지점이며 길천 공소와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으며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언양성당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422(신:언양읍 송대리 구교동1길-11)
TEL : 052-262-5312,3 FAX : 052-262-5316
EMAIL : ey262531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