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림굴 이란-
소 재 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이곳은 기해박해 당시 천주교 교우에 대해서는 인정 사정 없이 잔혹했던 관아의 손길을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던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입니다.
재너머 간월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명의 신자가 한꺼번에 숨어 불을 피울 수 없었으므로 곡식을 물에 불여 생식을 하며 생활하였다는 이 천연석굴 공소는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위장이 용이하였습니다.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는 이곳에서 약4개월간 은신하며 미사를 집전하였고,
1860년 9월 3일자로 된 그의 마지막 서한을 남겼습니다.
울산장대의 3인 순교자 - 이양등(베드로)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가)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하였으며, 병인박해의 여파로 해체되었습니다.
생쌀을 씹으며 지킨 신앙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최양업 토마 신부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
1860. 9.3 죽림굴
경신박해(1860)의 언양지역 상황에 대해...
-최양업 토마 신부님의 편지-
"예수 마리아 요셉
죽림굴에서 1860년 9월 3일 리보아 신부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공경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에게 공동편지를 보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 편지를 두분 뿐만 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에게 보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박해의 풍파로 한 모퉁이에 갇혀서 신자들과 아무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어져 그들의 생사도 모릅니다. 이 편지도 중국에까지 도착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박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포졸들이사방으로파견되어 신부님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내 지방에서 17명이 체포되었는데, 남자가 14명, 여자가 3명입니다. 남은 신자들도 그의 다 그들 지방에서 쫓겨나 집과 전답과 가산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의지할 데도 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잡힌 신자들은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가정물건들은 포졸들이 약탈했거나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신자 친척이나 신자 친구들을 피신시켜 주었던 외교인들도 신자들과 같은 운명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동리의 주민들이 신자들 때문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신자들로 하여금 아무 데도 발을 붙이지못하도록결의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잡아 가둘 수도 없고, 다 재판에 회부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포졸들을 여기저기 파견하여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또 외인들을 충동하여 신자들을 적발하게 합니다. 이 방법이 신자들에게는 더 가혹하고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체포된 17명 중 3명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왜 석방되었는지 원인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배교한 것 같습니다. 2명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1명은 대구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요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석방되었다고 합니다.열심한 여신자가하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천주교에 나오게 인도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노파는 체포되어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10명이 경주감옥에 갇혀 있는데 3명은 문초를 당할 때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고생하며 함구합니다. 그들 중 16세 된 소년이 있는데, 옥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24세된 동정녀가 있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하여 모든 신자들 중에서 출중하므로일반의 존경과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를 원하더니 자기 부친과 다른 신자들이 체포될 때 포졸들한테 가서 자기도 같은 신자이니 잡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신자들의 만류로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거기서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포졸한테 가서 잡혀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때 이 동정녀가 가르치며 선생처럼 지도한 두 처녀를 묶어가지고 가다가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으므로 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처녀들을 농락하고 나서 다른 데 팔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세 처녀들은놓아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놓여 났습니다. 동정녀의 이름은 아가다였습니다. 아가다의 부친과 오빠가 감옥에 갇혔고, 집도, 갈 곳도 없어 방황하다가 마침내 내게로 왔습니다.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둘러있던 신자들과 같이 임종경의 마지막 말마디를 끝내자 아가다는 운명하였습니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하여 사방의 많은 외교인들 중에서 예비자들이 속출하므로 큰 위안과 희망을 가졌습니다. 내 지방에서만도 예비자 수가 거의1,000명에 이르렀을것입니다. 어떤 동네는 전체가 문답과 경문 배우는 데 경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박해로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없애기 위해 무장하고, 동리마다 신자들을 추방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인기는 몰락하고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자들은 실망하고,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배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까지 굳세게 용맹히 신앙을 지킨 신자들까지도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젊은 과부나 처녀들은 더욱 큰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벌써 한 신자 과부가 외인한테겁탈을 당하였고, 남편이감옥에 갇힌 젊은 부인 한 사람과 처녀 한 사람도 겁탈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에 저들이 아직은 몸의 순결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신자 처녀들을 할 수 없이 외인과 정혼시켰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겁탈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전례200년사에서)
조선교구 사제 최 토 마 올림" 천연석굴 공소
죽림굴(대재공소)(1840~1868)